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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6; 2022 > Article
조선 초기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 후령통 연구

Abstract

해인사 비로전에는 2존의 통일신라 9세기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상 내부에서 거의 유사한 1490년에 안립한 복장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오보병을 후령통에 안립하고 그 위에 사리합(통)과 심주를 둔 후 원경으로 덮는 방식과 뚜껑에 진심종자를 쓰던 형식은, 고려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륜종자를 오보병에 쓰고 오보병을 오경의 형태로 제작한 점, 팔엽연화봉으로 오보병을 덮은 점, 오륜종자 혹은 사방주를 쓴 황초폭자를 도입한 점, 청초주서에 원문을 쓰도록 한 점 등은 새로운 혁신이었다. 또한 긴 후혈을 갖춘 후령통은 상원사 문수동자상에서 처음 시작되어 해인사 복장물에서 정연한 체계를 갖추게 된다. 중요한 점은 그 제작 배경에 교리와 사상에 밝으면서 당시 불사를 이끈 신미대사와 학조대사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용천사판 『조상경』 (1575)과 해인사 필사본 『聖像塑畵腹藏儀』는 복장물의 구성과 관련된 중요한 경전이다. 특히 복장물 가운데 오시화, 오채번, 오산개는 『묘길상대교왕경』의 영향으로 16세기 용천사판 『조상경』의 출간 즈음 복장물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1490년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물 안립 형식인 후령통 내부에 오보병을 안립하고, 팔엽개, 양면원경을 두는 방식은 16세기 정리된 용천사판 『조상경』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후령통은 조선시대 후령통의 전형적 범본이 되었다.

Abstract

In the Vairocana Hall of Haeinsa, there are two Vairocana statues made in the 9th century,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In 1490, the statues were filled with sacred objects whose specific contents were almost identical to each other. Following the practice passed down from the Koryŏ period, five treasure bottles were put inside an offering container termed “throat-bell container” which was then topped with a sarira reliquary and a bead. It was covered with a round mirror and true-mind syllables(chinsim chongja 眞心種子) were written on the lid. There are also innovations made in the Chosŏn period: namely, five-wheel syllables(oryun chongja 五輪種字) written on the five treasure bottles that take the shape of five mirrors, bottles covered with eight-petal lotus bud, the use of yellow fabric wrappers with the written spells of the four directions(sabangju 四方呪) or five-wheel syllables and the votive inscription written in red ink on blue textile. The earliest example of the offering container with a long breathing hole was found inside the Manjushri statue of Sangwŏnsa. A well-organized system had been established by the time the offering containers at Haeinsa were prepared. As the Great Preceptors Sinmi and Hakcho, renowned Buddhist monk scholars were in charge of enshrining the offering container, it is likely that they exerted a considerable influence on the organization of the sacred objects.
The Yongch’ŏnsa edition of Chosang kyŏng (Sutras on a manuscript entitled Sŏngsang sohwa pokchang ŭi (Manual on the pokchang of sculpted and painted sacred icons) preserved at Haeinsa are two important texts that dictate how to prepare the sacred objects for offerings. Inclusion of five flowers, five flags, and five parasols were the influence of Myogilsang taekyowang kyŏng (Sutra on the king of the great teaching which is sublime and auspicious) and likely began around the time the Yongch’ŏnsa edition of Chosang kyŏng was published in the sixteenth century. In conclusion, the throat-bell container from the Vairocana Buddha statues of Haeinsa can be considered as a prototype for offering containers made during the Chŏson.

Ⅰ. 머리말

佛腹藏은 불상의 몸 속에 넣는 여러 가지 물목 혹은 그 물목을 넣는 의례를 의미한다. 불복장은 대략 12-13세기경부터 시작되어 14세기에는 널리 확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불복장 안립의 구체적 양상은 13세기 이래 조성된 불상 내부에서 나온 각종 복장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1 대표적인 사례로 1346년 제작된 문수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에서는 2건의 발원문, 복장물에 안립된 물목을 기재한 「彌陀腹藏入物色記」, 발원자의 이름이 적힌 각종 직물, 12세기에 간행된 경전, 의복, 각종 다라니 등이 발견되었다.2 14세기 들어 확산된 불복장은 조선시대로 접어들면 보편화되어 불상과 보살상을 조성할 때에는 반드시 복장물을 안립하였다. 이러한 복장물 안립의 보편화는 16세기 중엽 출간된 『造像經』의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3 『조상경』의 간행은 이제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 불복장 의례가 경전에 의거하여 규범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불복장 물목 및 의례에 대한 정리는 복장물의 봉안처 혹은 소장처가 진행한 각종 도록을 통해 이루어졌고,4 이러한 정리를 바탕으로 분야별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불복장에 안립된 물목들은 발원문, 경전류, 후령통 등 다양하여 그 연구는 불상과 복장물,5 복장의례연구,6 복장직물,7 복장 경전,8 복장발원문에 대한 연구9 등으로 나누어져 진행되었다. 최근에는 불복장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八葉筒 혹은 喉鈴筒과 五寶甁을 분석하면서 이를 19세기 간행된 『조상경』 (유점사판)과 밀교경전과 연관시킨 연구가 있었다.10
고려시대 팔엽통이 조선시대 후혈을 갖춘 후령통으로 변모하였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때문에 고려시대의 팔엽통이 조선시대의 후령통으로 변모해 가는 세부적 양상에 대한 분석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분석은 아직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1575년 간행된 용천사판 『조상경』과 15세기의 여러 복장 사례 특히 완전한 형태로 확인된 해인사 법보전·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후령통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용천사판 『조상경』은 가장 이른 시기의 판본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며,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물은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조선 초기의 중요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있다.
본 논문은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에서 나온 복장유물과 후령통을 분석한 것으로 특히 불상에서 나온 후령통과 용천사판 『조상경』의 내용을 비교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고려의 팔엽통이 후혈을 갖춘 조선의 후령통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후령통이 조선시대 불복장의 시원적 사례인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Ⅱ. 용천사판 『조상경』 내용 분석

불복장 의식집으로 알려진 『조상경』은 총 5종의 목판본이 알려져 있고 19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 몇 건이 전하고 있다. 목판본은 1575년 龍泉寺판, 1697년 楞伽寺판, 1720년 華藏寺판, 1746년 金龍寺판, 1824년 楡岾寺판이 알려져 있다. 이들 판본 가운데 유점사본은 수록 내용이 자세하고 잘 정리되어 있어 현재 번역본이 출간되었고 널리 활용되고 있다.11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본은 1575년 전라도 담양 추월산 용천사에서 개판한 『조상경』이다. 용천사판 『조상경』의 체계에 대해서는 이미 선행연구에서 간략하게 소개된 바 있다.12 용천사판 『조상경』은 크게 2개의 부분 ‘제불보살복장단의식’과 ‘대장일람경 조상품 14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자는 『대장일람경』 조상품의 내용 일부를 추려 轉載한 것이고, 불상을 조성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여러 공덕이 핵심 내용이다. 따라서 ‘조상품 14칙’에는 의례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없다.
의례와 관련된 내용은 ‘제불보살복장단의식’에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가장 먼저 복장물과 그와 관련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요나라의 國師 慈賢이 지은 『妙吉祥平等秘密最上觀門大敎王經』 (이하 『묘길상대교왕경』) 1권의 내용 일부가 전재되어 있다. 마지막에는 ‘三悉地壇釋’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善無畏가 번역한 『三種悉地破地獄轉業障出三界秘密陀羅尼陀法』을 발췌한 것이다.
자현의 『묘길상대교왕경』은 오병과 오보 등의 물목이 가진 의미와 장엄할 때 필요한 진언과 수인 등을 주 내용으로 한다. 예를 들어 동방은 “청색 마노보병, 금강바라밀보살을 표현하며 이 보살의 진언을 108번 가지한다. 양손은 금강박으로 하고 인(오른손 중지)과 원(왼손 중지)의 손가락을 바늘처럼 세운다. 이것을 금강심인이라 한다(東方 靑色 瑪瑙寶甁 表金剛波羅蜜菩薩以菩薩眞言 加持一百八遍 二羽 金剛縛 忍願竪如針 是名金剛心印).”13 이처럼 동방 마노보병이 나타내는 금강바라밀보살에 대한 진언과 수인이 수록되어 있다. 오병 다음에는 오곡, 오보, 오약, 오황, 오개자, 오색채, 오색사, 오시화, 오보리수엽, 오길상초, 오산개 등의 순으로 기재하고 있으며 각각의 진언 그리고 진언의 효과를 수록하였다. 이처럼 각 항목에는 구체적인 물목이 아니라 추상적인 내용을 기재하고 있다. 오곡의 경우 “이 오곡은 지·화·수·풍·공이 만들어 낸 것으로 오불종자인 불종자, 법종자, 지종자, 보종자, 금강종자를 표현한 것이다(此五穀地火水風空所成 表五佛鍾子 佛種子 法種子 智種子 寶種子 金剛種子).”14라고 하여 구체적인 명칭을 기재하고 있지는 않다. 이런 측면에서 『묘길상대교왕경』은 구체적인 물목을 수록하기보다는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경전이다. 한편 선무외의 ‘삼실지단석’은 五輪種字의 의미를 비밀실지, 입실지, 출실지의 단계별 의례 행위가 가진 의미를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이 역시 복장물에 대한 기술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복장물에 대한 내용은 ‘제불보살복장단의식’의 첫 번째 부분에 서술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의 전반부에는 『불설다라니집경』, 『大毘盧舍那成佛神變加持經』 (『대일경』), 『대일경소』, 『佛說一切如來安像三昧儀軌經』 (『안상경』), 『佛頂尊勝陁羅尼念誦儀軌法』 (『존승의』) 등의 경전을 인용하여 단어 의미나 의례의 중요성이 설명되어 있고, 이어 의례에 사용될 물목들과 각 물목의 안립 절차가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물목과 안립 절차에 대한 내용은 ‘所入諸色’과 ‘腹藏入物抄錄’이라는 서로 다른 제목으로 중복하여 수록되어 있다. ‘소입제색’이 먼저 기술된 이후 다시 ‘복장입물초록’을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
‘소입제색’은 오보병을 설명하고 이어 안립될 각종 물목으로 다라니, 은합, 무공심주, 후령, 팔엽통, 願文을 기술한 뒤, 안립 절차를 설명하고 있다. ‘복장입물초록’ 역시 오보병과 관련된 항목을 기술한 뒤, 안립된 각종 물목, 팔엽통, 각종 다라니, 은합, 무공심주 등을 기술하고 뒤이어 팔엽통 내부의 안립 절차를 기술하고 있다. 유사한 내용을 연이어 기재한 정확한 배경은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두 기록 사이에 다소간의 차이가 있어 면밀한 대조가 필요하다. 오보병, 팔엽통과 후령, 안립 절차로 구분해서 두 기록을 비교해 보았다.
먼저 오보병에 대한 기술이다. ‘소입제색’과 ‘복장입물초록’ 모두 가장 먼저 각 방위별 오보, 오향, 오약, 오황, 오개, 오곡 등을 기술해 두었다. ‘소입제색’은 오경을 함께 기술한 것에 반해 ‘복장입물초록’은 오경에 대한 내용을 제일 마지막에 적어 둔 점에서 다르다. 여기서는 두 내용을 통합하여 정리하였다<Table. 1>.
‘소입제색’과 ‘복장입물초록’은 방위의 형태, 색, 각종 물목 등이 모두 같다. 다만 ‘소입제색’에는 위의 10개 항목 이외에 여러 물목들이 추가로 기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동방의 경우 ‘靑綵幡 時花 香樹葉 矩舍草 靑盖 靑帛杵 靑線’이, 남방의 경우 ‘摩訶矩舍草 紅蓋 紅綃幡 紅線 時花楸樹葉 紅帛杵’가, 서방의 경우 ‘白綵幡 白線 白蓋 時花 夜合樹葉 室理矩舍草 白帛杵’가, 북방의 경우 ‘黑綵幡 黑線 時花 梧桐葉 芯芻矩舍草 黑蓋 黑帛杵’가, 중앙의 경우 ‘黃綵幡 黃線 時花 檉樹葉 悉黨矩舍草 黃蓋 黃帛杵’가 수록되어 있다. 19세기 간행본인 유점사본과 해인사 필사본 『聖像塑畵腹藏儀』의 경우 이들 항목이 오색채번, 오색사, 오보리수엽, 오길상초, 오산개, 항목으로 각각 나뉘어 수록되어 있으며 내용은 같다. 다만 靑帛杵, 紅帛杵, 白帛杵, 黑帛杵, 黃帛杵는 유점사판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한편 ‘복장입물초록’에는 ‘소입제색’에 없는 五智와 각 방위에 해당하는 여래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이처럼 ‘소입제색’은 복장물이 더 많이 열거되어 있고, ‘복장입물초록’은 오지와 여래의 이름이 나와 있어 서로 보완하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양상은 오보병 이외의 복장물과 안립 절차에 대한 기술에서도 확인된다. ‘소입제색’은 오보병에 넣을 물목들을 나열한 뒤, 나머지 복장물들을 나열하고 있어 팔엽통, 무공심주, 원문에 대한 기술은 서로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Table. 2>.
오보병 이외의 복장 안립물 가운데 두 기록 모두 같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항목은 무공심주, 양면원경이다. 팔엽통은 1개를 안립하지만 세부 내용은 다소 차이가 있다. ‘복장입물초록’에서는 팔엽통에 사리 7조각을 넣는데 팔엽통은 둥글며 크기가 5분, 1촌 1분, 2~3분으로 흰유리통에 담는다는 것이다. 이외에 오색사, 황초폭자, 원문도 차이를 보이는데 크기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용도를 설명하는 것이다. ‘소입제색’은 오색사는 10척 혹은 50척의 길이에 후령을 감싸며, ‘복장입물초록’은 후령팔엽통을 싸는 용도로 황초폭자를 기술하고 있다. 황초폭자 한변의 길이가 1척 5촌에 정사각형인 점은 공통된다. 願文 역시 청초에 붉은 글씨로 쓰는 재료는 같지만 ‘소입제색’에서는 기재될 세부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용천사판 『조상경』의 이러한 복장물 부분은 기존 경전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경전을 만들면서 유사하지만 다소 상이한 2개의 전승을 함께 수록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15 2가지 전승이 시기적 차이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지역적 차이에 기인한 것인지 현재로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복장물에 대한 기록과 복장사례를 고려하면 ‘복장입물초록’이 ‘소입제색’보다 이른 시기의 기록으로 판단된다. 이는 관련된 가장 이른 기록인 고려시대 문수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에서 나온 「미타복장입물색기」와 ‘복장입물초록’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3열로 기재된 「미타복장입물색기」에는 오향, 오약, 오보, 오황, 심경, 심주, 후령, 오색백, 오색사, 건반, 황초폭자, 팔엽통, 사리통 등 복장물이 매우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는데,16 여기에 기재된 내용은 ‘복장입물초록’과 매우 유사하다<Table. 3>.
위의 표에서 확인되듯이, 문수사 「미타복장입물색기」와 ‘복장입물초록’은 오향, 오약, 오보, 오황, 오곡 그리고 후령 팔엽통 황복자(황초폭자), 심주 등 기본적인 물목에서 공통된다. 다만 「미타복장입물색기」에서는 사리통, 건반 및 안료가 있으며 ‘복장입물초록’에는 五芥와 오경 등이 있는 차이는 있지만 유사성이 더 크다. 따라서 ‘복장입물초록’은 고려시대 복장물에 기반을 두고 작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에는 기본적으로 팔엽통, 후령, 심주, 원경 그리고 오보병 안에 들어갈 각종 오보, 오약, 오곡 등의 물목이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 이후 현재 복장의례에는 이들 물목 이외에 새로운 물목들이 추가되는데 이는 용천사판 『조상경』의 ‘소입제색’에서 확인된다. ‘소입제색’에는 오보병에 안립될 물목이 증가한다. 오색채번, 오색사, 오보리수엽, 오길상초, 오산개 등의 항목이 ‘소입제색’에서 확인되며 이러한 항목은 19세기 유점사판 『조상경』의 ‘腹藏所入諸色’과 19세기 필사된 해인사 『聖像塑畵腹藏儀』17의 ‘諸物預備’로 이어진다. 오보병과 관련된 항목의 증가 원인은 자현의 『묘길상대교왕경』의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18 『묘길상대교왕경』에는 주로 오보병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 기재된 오병 관련 물목은 오곡, 오보, 오약, 오향, 오황, 오개자, 오색채, 오색사, 오시화, 오보리수엽, 오길상초, 오산개이다. 이 물목은 오금강저를 제외하면 ‘소입제색’의 오보병 관련 물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한편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오보병과 관련된 물목의 증가와 더불어 복장물 자체의 변화가 발생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후령이 사라지고 팔엽통이 후령통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복장물의 기록에서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고려시대 복장물은 발원문에 기재된 ‘擧案’에도 기재되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擧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322년 천수관음보살상에 기재된 내용이다.19 발원문 셋째 폭에는 거안이라는 제명 아래 불상의 조성과 복장에 사용된 17개의 물목이 나열되어 있다. “鑄成金三百斤, 金本三升布六十疋, 蠟蜜二十斤, 黃漆, 上金雪線子三斤, 香帒四十, 八葉筒, 喉鈴, 蓮臺座, 錦座子, 綵色, 阿膠, 眉光珠, 淸鏡, 七寶, 五香, 五藥” 이 물목 가운데 상당수는 불상의 조성에 사용된 것이고 팔엽통, 후령, 청경, 칠보, 오향, 오약 정도가 불복장에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1327년 성불사 아미타불의 발원문20에도 擧案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金四兩, 鍮銅五百斤, 蜜七十斤, 喉鈴, 八葉筒, , 眉間, 丹靑, 衣纏, 口食’이 기재되어 있다. 이 가운데 복장물은 후령, 팔엽통, 衣纏, 口食정도로 생각된다. 1351년 안립된 해인사 관음보살복장에서도 擧案이 확인되었다. 거안에는 ‘金箔二十束, 黃蜜, 丹靑, 口食, 衣纏’이 기록되어 있는데 衣纏, 口食이 복장에 안립되었을 것이다.
衣纏, 口食은 『조상경』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물목이다. 구식은 ‘미타복장입물색기’에 기재된 乾飯으로 추정된다. 실제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1302년 복장, 1346년 문수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 1351년 해인사 소장 관음보살좌상 복장에서는 건반이 확인되었다. 의전은 의복으로 의복은 『조상경』에는 기재되지 않았지만 고려 이래 조선시대까지 지속된 안립품 가운데 하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처럼 고려시대 복장물 가운데 팔엽통과 후령은 핵심적인 복장 안립물이었다. 팔엽통의 존재는 1575년 간행된 용천사판 『조상경』에서도 확인된다. ‘소입제색’과 ‘복장입물초록’에는 모두 안립된 물목으로 팔엽통이 언급되어 있어 이 시기까지는 그 명칭이 이어지고 있었다. 반면 후령은 ‘거안’과 「미타복장입물색기」에서 모두 확인되는 물목이다. 그런데 용천사판 『조상경』 ‘소입제색’과 ‘복장입물초록’에서 후령은 독자적 물목으로 언급되기보다는 다른 물목을 설명하면서 함께 언급하고 있다. ‘소입제색’에서는 五色繩으로 후령을 둘러 묶는 것으로[結環喉鈴], ‘복장입물초록’에서는 황초폭자를 설명하면서 후령팔엽통을 싸는 것으로[喉鈴八葉筒裹黃綃幅子] 설명하고 있을 뿐 독자 물목으로 기재하고 있지는 않다. 후령이 용천사판 『조상경』의 복장물에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이 경전이 조선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조상경』 용천사판과 고려시대 「미타복장입물색기」를 분석해 보면 복장물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차이는 후령, 오보병에 집중되어 있는데 다음 장에서는 실제 복장 사례 특히 1490년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에서 나온 후령통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1490년 제작된 해인사 비로자나불좌상 복장의 후령통은 1575년 간행된 용천사판 『조상경』의 ‘복장입물초록’의 筒內藏次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Ⅲ.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후령통의 특징

해인사 법보전과 대적광전에 봉안되어 있던 2구의 <목조비로자나불좌상>에서는 조선 전기 불복장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다수의 복장물이 확인되었다. 통일신라 883년에 조성된 2존의 불상21에 언제 처음으로 복장이 안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490년 해인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면서 복장도 재안립하였다. 2존의 복장물은 양상과 내용이 거의 유사하므로, 여기서는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물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해인사에는 19세기 제작된 필사본 『聖像塑畵腹藏儀』가 전해 내려오므로 이를 함께 분석하여 해인사 불복장의 특징과 그 의미를 검토하고자 한다.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2005년 개금불사를 진행하면서 내부에서 복장물이 발견되었다. 복장물에서는 충전 역할을 한 다수의 직물, 경전, 다라니가 나왔으며 내외 두 겹의 황초폭자 안에서 후령통이 함께 확인되었다. 황초폭자는 謹封紙帶로 묶여 있었으며 황초폭자를 풀면 五色 천으로 후혈을 감싼 은색의 후령통이 있고 후령통의 아래에서 小寶篋陀羅尼와 청초홍서의 원문이 확인되었다(Fig. 1).
후령통은 황색폭자에 싸여 있었으며, 그 네면에 붉은 주서로 사방주를 적었다. 황초폭자는 1346년 문수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에서 나온 「미타복장입물색기」에서 처음 그 존재가 확인된다. 그런데 고려시대 팔엽통은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장곡사와 문수사 복장사례에서 팔엽통을 싼 폭자는 확인되었으나 황백색, 아청색 등 6종의 직물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22 1351년 조성된 해인사 <금동관음보살좌상>에서는 미색과 청색 등 직물에 싸인 팔엽통이 발견된 바 있다. 15세기가 되면 황초폭자의 양상이 다소 변화한다. 황초폭자의 수가 줄어들고 표면에 오륜종자 혹은 사방주를 기재하였는데, 현재까지 이러한 형식의 황초폭자가 확인된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는 1466년 오대산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의 후령통을 싼 황초폭자이다.
국보 221호로 지정된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造成發願文에 의하면 이 상은 1466년(세조 12) 懿淑公主와 그의 남편 鄭顯祖가 발원하여 조성하였다. <목조문수동자상>의 복장에서는 유물을 쌌던 황초폭자와 후령통, 조성원문 등이 나왔다. 이 가운데 황초폭자는 중심부에 다라니, 네 모서리에는 범자, 범자 사이에는 여래와 탑이 마주보는 형태를 한 문양이 찍혀 있다. 네 모서리의 범자 가운데 세 모서리의 범자는 『조상경』 삼실지단석 항목에 수록된 삼실지 즉 비밀실지(오륜종자), 입실지, 출실지로 추정된다.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의 황초폭자는 그 표면에 오륜종자를 적은 최초의 사례이다. 이러한 형태의 황초폭자는 1490년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에서 변화가 발생한다.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목조문수동자상>과 유사하지만 황초폭자에 오륜종자만 방위와 색을 갖추어 적었다(Fig. 2).
이처럼 황초폭자에 오륜종자를 쓴 것은 팔엽통의 형태변화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려시대에는 ‘황폭자’라는 명칭과 함께 다양한 색과 종류의 직물이 함께 발견된다. 오륜종자는 팔엽통의 내부 혹은 외부에 방위색에 맞추어 기재하였다. 1302년 온양민속 박물관 소장 은제합, 통영 안정사의 경우 합 내부에 오륜종자를 써서 방위에 맞는 색과 형태를 갖추어 붙여 두었으며, 해인사 <금동관음보살좌상>과 <지장보살좌상>의 은제합의 경우 외부에 오륜종자를 써 두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팔엽통에 오륜종자가 기재된 형태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팔엽통이 후혈이 달린 후령통으로 변화하면서 오륜종자를 써 두는 위치가 변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후령통 몸체가 아니라 황초폭자에 오륜종자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오륜종자가 황초폭자에 쓰인 최초의 사례는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이고, 이것이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황초폭자로 이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 황초폭자의 중앙에 있는 다라니는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에서는 소보협다라니의 형태로 전환되어 황초폭자가 아니라 별도의 백지에 황색으로 써서 황초폭자 위에 두는 형태로 변화했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해인사 필사본 『聖像塑畵腹藏儀』에는 白綃金書로 보협주를 쓰도록 명기하고 있다. 황초폭자 위에 별도로 제작한 보협다라니를 두는 것은 15세기 이래의 전통으로 생각된다.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과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유사성은 願文에서도 확인된다. 용천사판 『조상경』 ‘소입제색’과 ‘복장입물초록’에서 원문은 靑綃紅書 혹은 靑綃朱書하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원문 기재 방식은 고려시대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까지 보고된 고려시대 원문은 모두 직물 혹은 종이에 묵서된 형태이고 양식도 일률적이지 않다. 이에 반해 용천사판 『조상경』에서는 청초주서로 명시하고 있고 이러한 원문의 최초 형태는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이고 그 다음이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그런데 15세기 왕실발원 불상의 사례를 살펴보면 청초주서의 원문 형태가 일반적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15세기 대표적인 왕실발원 불상으로 1458년 효령대군과 의빈 권씨 등이 발원하여 조성한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원 사찰 法泉寺)의 복장발원문은 청초에 묵서이고, 1466년 효령대군이 발원하여 조성한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발원문은 백초의 묵서이다(Fig. 3). 따라서 청초주서의 원문 형태는 15세기에 일반화되지 않았고, 16세기 『조상경』이 처음 만들어지면서 이후 기본적인 형태로 정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후령통은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의 후령통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두 사찰의 불사를 주도한 승려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국보 292호 「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 (이하 「권선문」)에는 상원사 중창 권선에 信眉, 學悅, 學祖대사가 주도하였으며 세조 등 당시 왕실의 주요 인물들이 상원사 중창에 시주하였다. 「권선문」의 작성 시기는 <목조문수동자상>이 조성되는 1466년 2년 전인 1464년(세조 10)이다. 따라서 상원사 중창과 <목조문수동자상> 조성은 신미와 학조스님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을 것이다.
신미대사는 해인사 대장경판 인경을 감독한 고승이고 학조대사는 성종대 해인사 중창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신미대사와 학조대사가 불사에 참여한 두 사찰에서 복장물의 공통적 특징이 보이는 점은 경전에 밝은 당대 고승들의 의견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측면에서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과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의 복장에서 오륜종자가 적힌 황초폭자와 보협다라니, 청초주서의 원문이 나타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황초폭자의 등장, 청초주서의 발원문 등장은 신미·학조대사와 관련성이 높았을 것이다. 두 상에서 나온 후령통의 형태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Ⅳ.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후령통 내부 구조와 용천사판 『조상경』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후령통은 15세기의 대표적 후혈을 갖춘 후령통으로 이러한 형태의 후령통은 15세기부터 나타나는 새로운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즉, 불상의 목 안에 놓였던 후령이 사라지고 팔엽통은 긴 후혈을 갖춘 후령통으로 변화한다. 물론 예외적으로 고려 후기부터 지속된 합 형태의 후령통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긴 후혈을 갖춘 원통형 후령통은 조선시대 가장 자주 확인되는 형태이다. 연대가 확인된 이러한 형식의 후령통은 1466년 상원사 <문수동자좌상>에서 나온 후혈을 갖춘 후령통이 최초이다. 이 형식은 1490년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후령통에서 다시 재현되는데 후혈에 여러 색의 직물로 장엄한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되어 제작된다.
그러나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과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후령통 형태는 같으나 세부에서는 차이를 보인다(Fig. 4). <목조문수동자상> 후령통 뚜껑은 팔엽(실제는 9엽임) 연화의 형태이나 비로자나불좌상의 후령통은 팔엽이 없고, 뚜껑에 진심종자가 방위색에 따라 쓰여져 있으며 몸체 사방에는 사방주가 범자로 방위색을 갖추어 쓰여 있다. 뚜껑에 진심종자를 쓰는 것은 고려 이래 팔엽통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몸체에는 오륜종자가 아니라 사방주를 써 뚜껑과 방위를 맞추었다. 해인사 필사본 『聖像塑畵腹藏儀』에는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중앙에는 후혈을 뚫고 또 사방주를 써서 방위를 바로잡아 통 덮개를 씌울 때 차이가 없도록 한다. 구본에는 통체에 사방주를 쓰고 통 덮개에 진심종자를 썼는데 뚜껑에 후혈이 있어 중방의 글자를 쓰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지금은 바꾸어 쓴다(中央通喉穴 又書四方呪 以定方位 筒盖合閉時 勿使有差也. 舊本筒体書四方呪 筒盖書眞心種子 而以盖有喉穴 難書中方字故今換書也).” 원래 후령통 몸체에는 사방주, 뚜껑에는 진심종자를 썼으나 뚜껑에 후혈이 생기면서 중방의 글자 캄을 쓰기 어려워 사방주로 바꾸어 쓴다는 것이다.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구본의 형태대로 몸체에는 사방주를 쓰고 뚜껑에는 진심종자를 썼다. 중방자는 후혈 벽면에 황색으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후혈이 일반화되면서 뚜껑에 쓴 진심종자는 사방주로 점차 바뀌어 갔다.23
한편 해인사 필사본 『聖像塑畵腹藏儀』에는 후령이 사라지고 후혈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기술하였다. “후령이라는 것은 비유이다. 목구멍[喉]라는 것은 사람의 목구멍과 같다. 목구멍 아래 오장이 있고 지금 통의 후혈 아래에는 오병이 있다. 鈴이라는 것은 통이 방울처럼 둥글기 때문이다(喉鈴者喩也 喉者如人喉 穴之下有五藏 今筒喉血之下 有五甁也. 鈴者 以筒圓如鈴也)” 용천사판 『조상경』 ‘복장입물초록’에는 喉鈴八葉筒이라는 표현이 있고 안정사 <금동여래좌상>의 사례에서 후령이 팔엽목합의 위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후령은 목구멍, 오병이 있는 팔엽통은 오장을 상징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구조가 15세기가 되면 목과 오장, 즉 후령과 오병을 연결한 후혈을 갖춘 후령통으로 변화된 것으로 파악된다.
후혈을 갖춘 후령통이 후령과 팔엽통을 계승하였다는 점은 후령통의 색에서도 확인된다. 15세기 후혈을 갖춘 후령통의 사례는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과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이외에 고려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조관음보살좌상>의 조선 초기 복장에서 나온 후령통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에서 나온 후령통 등이 있다.
두 후령통은 모두 후혈을 갖추고 있으며 은색을 띄고 있는데 재료는 은이거나 주석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은제 사리통을 계승한 것이고 백색유리통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조관음보살좌상>은 고려시대의 작품이지만 조선 초기에 다시 만든 후령통을 납입한 사례인데 주석과 납을 합금해 9:1의 비율로 합금한 주석 후령통이다.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후령은 수은아말감으로 도금한 것인데 굳이 은색을 내게 한 것은 백색유리통을 본뜨려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추정된다. 15세기에 제작된 후령통이 은색을 띤 것은 용천사판 『조상경』 ‘복장입물초록’에 그 단서가 남아 있다. “팔엽통 사리 일곱 개, 둥근 것을 사용하며 (크기는) 5분 혹은 1촌 1분 혹은 2~3분이다. 흰 유리통에 담는다(八葉箇(筒)舍利七粒 用圓 五分或寸一分 或二三分 白瑠璃箇(筒)盛之).” 즉 팔엽통은 흰색의 유리통으로 만들도록 했는데, 『佛說觀佛三昧海經』 4권에 의하면 여래가 해탈했을 때의 모습은 “眞金像을 이루었는데, 진금상 안의 부처님 가슴 속은 유리통과 같았다(成眞金像,眞金像內, 於佛胸中如琉璃筒).”24 『불설관불삼매해경』은 『조상경』 「대장일람품」에서도 인용한 경전이므로이 경전의 내용이 『조상경』의 다른 부분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재질적 특성상 흰 유리로 팔엽통을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고 이에 그 대체물로 흰색의 은이나 은색을 띤 재료를 이용하여 팔엽통을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 후기에는 흰색을 띤 주석후령통도 많이 제작되는데이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경전에 근거하여 흰색으로 후령통을 제작하던 방식은 고려시대 이래 내려오던 방식이었다. 15세기 은색 후령통의 시원은 고려시대 은으로 만든 합 형태의 팔엽통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복장물의 은제합과 2020년 조사된 합천 해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금동지장보살좌상>의 은합이다. 이 가운데 해인사 <금동관음보살좌상>과 <금동지장보살좌상>의 복장은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된 바 없으므로 그 양상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法林社 大藏殿의 주존으로 至正 11년(1351년, 충정왕 3년) 1월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금동관음보살좌상>·<금동지장보살좌상>의 복장에서 각각 은으로 만든 합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곧 팔엽통이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의 팔엽통은 3겹의 견직물로 싸여 있었고 <금동지장보살좌상>의 팔엽통은 다라니에 싸여 있었다. 팔엽통의 기본적인 구조는 같으므로 <금동관음보살좌상>의 합을 살펴보고자 한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의 팔엽통은 3겹의 직물로 싸여 있었는데, 제일 외부에는 흰색, 다음은 청색, 그 다음에는 長命이라는 수가 놓인 견직물이었다. 가장 바깥쪽 흰색 직물에는 약간의 건반이 확인되었다. 팔엽통의 뚜껑에는 연밥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 붉은 글씨로 진심종자의 범자가 쓰여져 있었다. 은합의 본체 외부에는 팔엽의 연밥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 오륜종자 가운데 네 방위를 나타내는 범자가 쓰여져 있다. 범자 주변에는 방위색이 채색되어 있다. 오륜종자의 중앙을 나타내는 범자 캄은 본체 내부 바닥에 주서되어 있다(Fig. 5).
뚜껑의 표면은 연밥이 표현되어 있으며 진심종자가 주서로 쓰여져 있다. 팔엽통 뚜껑에 진심종자를 쓴 사례는 1302년 온양민속박물관 은제 팔엽통, 1346년 문수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목제 팔엽통에서도 확인된다(Fig. 6). 문수사 목제 팔엽통의 경우 뚜껑 상부에 연밥이 그려져 있어 뚜껑의 안쪽 면에 진심종자를 주서하였다.
<금동관음보살좌상> 팔엽통의 몸체에는 오륜종자가 주서되어 있는데 가운데 방위에 해당하는 캄(坎)은 내부에 있고 나머지 네 방위의 범자는 외부에 주서되었다. 팔엽통 내부는 가장 상부에 관음이라 적힌 원경이 있다. 원경의 아랫면에는 모시에 진심종자를 금니로 쓴 글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고려시대 여러 사례에서 확인되는 형태이다. 특히, 1302년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은합의 경우 해인사 <금동관음보살좌상>처럼 원경 아래 범어를 금분으로 쓴 직물이 있어 같은 형태와 구조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인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의 팔엽통을 통해 고려시대 팔엽통 내부의 구조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팔엽통 몸체에는 오륜종자를 쓰고 뚜껑에는 진심종자를 쓴다. 이어 준비된 오보병을 안립하고 오보병 위에 유리 심주와 은으로 만든 사리통을 안치하며 그 위를 원경으로 덮은 뒤 뚜껑을 닫는다. 해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팔엽통의 안립 절차는 안정사 목제 팔엽통의 그것과 거의 유사하다. 다만 안정사의 경우 오륜종자 가운데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阿(동방, 방형, 청색), 囕(남방, 삼각형, 적색), 鑁(서방, 원형, 백색), 唅(북방, 반월형, 흑색)을 형태와 색에 맞게 제작한 후 목제 필엽통의 내부에 부착해 둔 것25에 반해 해인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의 은제 팔엽통에서는 오륜종자가 팔엽통에 직접 쓰여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안립 절차는 용천사판 『조상경』 ‘복장입물초록’ 항목에 기술된 ‘筒內藏次第’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26
‘통내장차제’는 “먼저 오륜종자를, 이어 진심종자를 안치하고 그 다음 오색 꾸러미, 사리통, 심주, 오색사를 각각 안치하고 원경으로 덮는다(先安五輪種子 次安眞心種子 次安五色裹帛舍利箇(筒) 心珠 五色絲 圓鏡盖之)”라고 안립 절차를 설명하고 있다. 이를 고려시대 팔엽통의 사례와 비교하면 오륜종자를 먼저 안치한다는 말은 오륜종자도를 안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륜종자를 팔엽합의 몸체 혹은 방위에 맞게 형태와 색을 갖춘 직물 등에 먼저 쓴다는 뜻이고 이는 진심종자는 뚜껑에 쓴다는 말이다. 그 다음 오색 꾸러미[五色裹帛] 즉 오보병을 넣고 그 위에 사리통, 심주, 오색사를 두고 원경으로 덮었다. 그렇다면 ‘복장입물초록’의 ‘통내장차제’는 고려시대 팔엽통의 안립 절차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팔엽통 내의 오보병은 그 내부가 정확히 조사되어 보고된 사례가 없으므로 오보병 안에 안립된 물목의 구체적 양상은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해인사 <금동지장보살좌상>의 은합 내부에서 나온 오보병 가운데 서방 보병은 실이 해체되어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주로 오곡, 오황, 오보로 추정되는 물목만 확인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1302년 온양민속박물관 은제합에서도 확인되었다. 합 내부에서는 유리조각, 호박 등의 보석류, 丁香과 白檀香 등의 향, 볍씨와 콩과 같은 곡물, 芥子 등이 나왔다. 이는 ‘복장입물초록’에서 나열한 물목들에 포함된 것이다. 따라서 ‘소입제색’에 기술된 오채번, 오시화, 오산개 등은 고려가 아닌 조선에 이르러 등장한 물목으로 추정된다.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후령통은 내부 형태가 완벽하게 보존된 상태로 조사된 15세기의 사례인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를 통해 15세기 후혈을 갖춘 후령통의 내부에 안립 물목의 종류와 절차가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후령통의 가장 아래 부분에는 홍치 3년 작성된 海印寺記가 있고 그 위에 오색실로 감싼 오보병이 있다. 이 오보병은 다시 저고리로 한번 더 감싸 매었다. 오보병 위에는 팔엽연화, 사리함, 무공심주, 그리고 조각보가 있고 무공심주 위에는 양면원경이 있다. 이러한 안립 절차는 기본적으로 해인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의 팔엽통인 은합의 안립 양상과 유사하고, 용천사판 『조상경』 ‘통내장차제’와도 같은 순서이다.
그런데 용천사판 『조상경』에는 이와 다른 안립 순서도 수록되어 있다. ‘소입제색’의 마지막 부분에는 후령통 내부 안립 절차가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먼저 오륜종자를 안치하고 이어 사리통을 안치하고 이어 심주를 안치하고 이어 오보의 주머니병[褁甁]을 안치한 이후 양면원경으로 덮는다(先安五輪種子 次安舍利筒 次安心珠 次安五寶褁甁然後 兩面圓鏡盖之).” 이러한 안립 절차는 ‘통내장차제’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통내장차제’는 오보병 위에 사리통과 무공심주를 두는 반면, ‘소입제색’에서는 사리통과 심주 위에 오보병을 둔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해인사 필사본 『聖像塑畵腹藏儀』 ‘제물예비’의 사라함조에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사리함조에는 “옛 본은 오병위에 사리함을 안치하였는데 2가지 뜻으로 사리함을 하면원경의 아래에 두었다. 첫 번째는 병입구에 묶여 있는 오색사가 뚫고 지나가기 불편해서이다. 두 번째는 양면원경은 오로지 오병을 위해 둔 것이기 때문에 하나는 오병의 아래에 두어 하면원경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오병의 위에 두어 상면원경이라 하였는데 사리함과 무공심주함이 오병의 위 상명원경의 아래에 있는 것은 군더더기라 할 수 있어 지금 고쳐 바로잡는다(舊本安五甁上 而有二義故 移安於下面圓鏡之下 一不便於繫甁口五色絲之穿過也 二兩面圓鏡專爲五甁而設 故一安五甁下 爲之下面圓鏡 一安五甁上 爲之上面圓鏡也. 然則二函在五甁上圓鏡下者 可爲贅矣 故今改定).” 무공심주와 사리함을 오병 위에 둘 때 오색실을 후혈로 빼는데 불편하고 양면원경은 오보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심주와 사리함이 군더더기처럼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하면원경 아래 사리함과 심주함을 두도록 고쳤다는 것이다. ‘소입제색’의 안립 절차는 이런 요인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해인사 비로자나불좌상의 후령통은 ‘소입제색’에서 설명한 안립 절차와 다른 이전의 방식을 따르고 있어 사리함과 무공심주함의 이동은 16세기 이후의 현상이라 생각된다. 한편 해인사 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에서는 새로운 물목도 확인되는데 오보병 위에 팔엽연봉과 조각보로 싼 직물이 그것이다. 팔엽연봉의 출현27은 후령통 형태의 변화와 유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원인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후령통의 가장 핵심적인 물목은 오보병이다. 다섯 방위에 따라 안립된 오보병은 고려시대 이래 팔엽통 혹은 후령통에 가장 핵심적인 물목으로 안립되었다. 해인사 오보병은 직물로 만들어져 있다. 오보병 내부에는 오곡, 오약, 오보, 오향, 방형의 오색 직물조각 등이 있었다. 오보병 내의 이러한 물목은 기본적으로 고려시대 오보병 물목과 유사하다. 다만 해인사 오보병은 매우 톡특한 형식을 띠고 있다. 오보병이 오방색을 띠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각 방위에 따라 오경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오륜종자가 오방색을 맞추어 쓰여져 있다. 오경은 다섯 방위에 따라 색, 형태, 오륜종자가 결정되어 있는데 용천사판 『조상경』 ‘소입제색’과 해인사 『聖像塑畵腹藏儀』에 의하면, 동쪽은 靑綃 方鏡(kjah-316-202212-001i3.jpg암暗), 남쪽은 紅綃 三角鏡(kjah-316-202212-001i4.jpg람囕), 서쪽은 白綃 元鏡(kjah-316-202212-001i5.jpg밤鑁), 북쪽은 黑綃 半月鏡(kjah-316-202212-001i6.jpg함唅), 중앙은 黃綃 圓鏡(kjah-316-202212-001i7.jpg캄坎)이다.
그런데 <비로자나불좌상> 후령통 안쪽 혹은 바깥쪽에는 오륜종자가 없다. 이는 고려시대 팔엽통의 형식과 다른 점이다. 1302년 온양민속박물관 은합, 통영 안정사 목합에는 오경의 형태를 가진 직물 혹은 종이에 오륜종자를 써서 합 내부에 부착해 두었고 1351년 해인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의 경우 합 내부 바닥과 외부 사면에 오륜종자를 기재하였다. 1490년 해인사 비로자나불 복장에서는 이러한 형태를 종합하여 오경의 형태를 본 따 오보병을 만든 것이다<Table. 4>. 이러한 형태는 완벽하지는 않으나 1346년 문수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28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후령통 내부 오보병은 오경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오방경을 따로 만들지 않고 오보병을 오경의 형태로 만들어 후령통에 안립하고, 오륜종자를 방위에 맞게 써 넣었다. 일반적인 조선 후기 방식은 오경을 후령통 외부에 묶어 방위를 표시한다. 따라서, 해인사 후령통의 오보병 안립은 고려시대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나름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오경과 오보병을 통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용천사판 『조상경』 중 『묘길상대교왕경』에는 오경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에 반해 ‘제불보살복장단의식’조에는 오경이 五智를 표현하는 것으로 『화엄경』 가운데 보현보살이 여래장삼매로 들어가 五海印을 觀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29 따라서 오경의 출현, 오경과 오지의 연결은 화엄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경의 의미와 중요성은 강조되어 있지만 복장물으로서의 오경 안립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오경의 안립과 관련한 내용은 ‘소입제색’조에 있다. <Table. 1>에서 확인되듯이, ‘소입제색’에서 각 방위별로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이 五鏡에 대해서이다. ‘소입제색’에서는 오경의 안립절차를 “오경 가운데 중방원경은 복판에 안치하고 나머지 사경은 통 밖에 매달아 둔다(五鏡內 中方圓鏡腹板安之 餘四鏡箇(筒)外懸之四方)”라고 기술하고 있다.30 이에 반해 용천사판 『조상경』 ‘복장입물초록’에서는 오경에 대한 언급이 없고 ‘통내장차제’ 이후 ‘五鏡次第’을 ‘방-삼각-원-반월-원’으로 기술하고 오경이 상징하는 오불을 기술할 뿐 오경의 안립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다만 ‘복장입물초록’이 ‘소입제색’보다 이른 시기의 전승으로 판단되며 조상경은 실제 안립 상황이 경전에 기술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이 문제는 앞으로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31 다만 현존 작품으로 분석해 보면 후령통 몸체에 오경을 오색사로 묶어 부착하는 형식은 16세기 이후에 출현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물은 오경과 오보병을 하나로 통합하여 해인사 고유의 독창적인 형식으로 발전시켰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형식은 기본적으로는 오경을 상징하는 오륜종자를 몸체에 적거나 각 방위에 맞는 직물을 부착하는 고려의 형식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15세기에 처음 출현한 후혈을 갖춘 후령통이 당시에 일반화된 것은 아니었다. 현재까지 보고된 15세기 후령통의 양상을 살펴보면, 후령통은 크게 2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15세기 왕실 발원 불상 가운데 1458년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성 당시 그대로의 복장물은 아니지만 한지에 싸인 오보병과 원형 사리합이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다.(Fig. 7, 8). 원래 후령통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어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오보병과 사리합의 양상은 해인사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비록 조금 후대이지만,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1502년 평안도 천성산 관음사에서 조성된 <목조보살좌상>의 복장 팔엽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목조보살좌상>의 복장에서는 후혈을 갖춘 후령통이 아니라 동으로 만든 팔엽합이 나왔다.32 팔엽합은 직경 7cm, 높이 3cm 정도의 크기에 한지를 겉면에 부착하고 한지를 꼬아 만든 끈에 싸여 있었다. 이는 의도적으로 흰색을 내어 은합처럼 보이려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팔엽합의 내부에서는 금박편, 유리, 수정, 실에 묶인 옥 등이 발견되었다(Fig. 9). 합 내부에서 나온 이들 물목들은 주로 보석이지만 『조상경』에 나오는 오보와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으며 유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 오곡, 오보 등 각종 물목은 별도로 종이에 싸서 안립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15~16세기 초의 복장에서는 다양한 형태와 안립방식이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팔엽합과 오보병을 별도로 안립하는 형태가 존재했던 과도기적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15세기 불복장 사례는 크게 2가지 형태가 존재하였다. 하나는 팔엽통을 이은 후령통이 출현하고 이 후령통 내부에 오곡, 오약, 오보 등 각종 물목이 들어 있는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형태와 오보, 오곡 등 물목을 별도로 포장하고 작은 사리합 속에는 사리만 안립하는 천성산 관음사 <목조관음보살좌상> 형태이다.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후령통은 후령을 후혈로 바꾸어 팔엽통과 통합하고 형태를 합에서 원통형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다. 그러나 오륜종자, 진심종자, 오보병의 형태, 무공심주와 사리통 등은 기본적으로 고려시대 불복장을 계승하고 있다. 15세기의 이러한 복장 양상은 16세기 이후 변모해 가는데,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 방식이 대세를 이루어 간 것으로 판단된다. 용천사판 『조상경』에 기재된 황초폭자, 후령통 안립절차 등은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 형태가 반영되고 있다. 즉 후령통 내부에 오보병을 안립하고 이를 오색사로 묶는 방식, 사방주 혹은 오륜종자를 쓴 황초폭자의 사용, 청초주서의 원문은 그대로 용천사판 『조상경』에 수용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17세기 후령통의 안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15세기 신미·학조대사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판단되는 상원사 문수동자상의 후혈을 갖춘 후령통의 제작 방식이 해인사 비로자나불좌상에서 보다 명료한 형태를 갖추었고 이후 16세기 용천사판 『조상경』에 반영되어 규범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Ⅴ. 맺음말

최근 불복장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고려의 불복장 특히 팔엽통이 후령통으로 전환되는 과정과 조선의 후령통 안립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본 논문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자세하게 분석되지 못한 용천사판 『조상경』 (1575)과 해인사 필사본 『聖像塑畵腹藏儀』를 기초로 복장물의 구성이 시기에 따라 변화하였음을 살펴보았다. 특히, 1490년 안립된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물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고려시대와 15세기까지 복장물에 오시화, 오채번, 오산개 등은 포함되지 못하다가 『묘길상대교왕경』의 영향으로 16세기 용천사판 『조상경』이 출간될 즈음에는 오시화, 오채번 등이 복장물에 포함된다.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긴 후혈을 갖춘 후령통의 등장이다. 이 후령통은 기본적으로 고려 팔엽통의 안립 방식을 따르며 특히 후혈에 직물을 감싸는 새로운 방식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긴 후혈을 갖춘 최초의 후령통은 상원사 <문수동자상>의 복장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불사에 참여한 신미대사와 학조대사의 영향이 작용한 결과로 판단된다. 신미, 학조의 이러한 영향은 해인사 <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으로 이어져 보다 정연한 체계를 갖추었다. 오보병을 후령통에 안립하고 그 위에 사리합(통)과 심주를 둔 후 원경으로 덮는 방식과 뚜껑에 진심종자를 쓰던 형식은, 고려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오륜종자를 오보병에 쓰고 오보병을 오경의 형태로 제작한 점, 팔엽연화봉으로 오보병을 덮은점, 오륜종자 혹은 사방주를 쓴 황초폭자를 도입한 점, 청초주서에 원문을 쓰도록 한 점 등은 새로운 혁신이었다.
후혈을 갖추고 내부에 오보병과 심주, 사리통과 팔엽연화봉을 둔 원통형 후령통은 15세기를 시작으로 점차 보편화된 형태로 발전된다. 그리고, 아직 조사 사례가 많지 않고 복장의 특성상 후대에 변화될 가능성이 있지만 15세기에는 흑석사, 왕룡사원, 천성산 관음사 <목조보살좌상> 복장의 사례를 보면 고려 팔엽통과 상이한 형태의 복장 의례도 존재한 것으로 생각된다. 16세기 『조상경』이 제작된 이후 후령통의 형태는 일률적이지 않고 오경을 두는 방식도 달랐다. 그러나, 후령통 내부에 오보병을 안립하고, 팔엽개와 양면원경을 두는 방식은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후령통에 준하고 있고 이는 16세기 정리된 용천사판 『조상경』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후령통은 조선시대 후령통의 전형이 되었다.

Notes

1 고려후기 복장물에 대해서는 정은우·신은제, 『고려의 성물, 불복장』 (경인문화사, 2017) 참조.

2 수덕사근역성보관, 『至心歸命禮-한국의 불복장』 (2004).

3 현재까지 알려진 『조상경』 판본은 1575년 출간된 龍泉寺版, 1697년 출간된 楞伽寺版, 1720년 출간된 花藏寺版, 1746년 출간된 金龍寺版, 1824년 출간된 楡岾寺版, 19세기 필사된 해인사본 등이 있다.

4 대표적인 예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온양민속박물관, 『1302년 아미타불복장물의 조사연구』 (계몽사, 1991); 수덕사근역성보관, 앞의 책; 해인사성보박물관, 『해인사 비로자나불 복장유물 특별전-誓願』 (2008); 해인사성보박물관, 『願堂』 (2017); 국립대구박물관,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불복장』 (2013).

5 대표적 논문은 다음과 같다. 문명대, 「고려 13세기 조각양식과 개운사장 취봉사목아미타불상의 연구」, 『강좌미술사』 8(1996), pp. 37-57; 同著, 「수국사 고려(1239년) 목아미타불좌상의 연구」, 『미술사학연구』 255(2007), pp. 35-65; 이분희, 「광주 자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성보』 6(2004); 이승혜, 「불상의 성물 봉안」, 『정신문화연구』 38권 1호(2015, 3), pp. 31-62; 정은우, 『고려후기불교조각연구』 (문예출판사, 2007); 同著, 「서일본지역의 고려불상과 부석사 동조관음보살좌상」, 『동악미술사학』 14(2013), pp. 73-93; 최성은, 「13세기 고려 목조아미타불상과 복장묵서명」, 『한국사학보』 30호(2008), pp. 111-151.

6 대표적 연구는 다음과 같다. 이선용, 「佛腹藏物 구성형식에 관한 연구」, 『미술사학연구』 261(2009), pp. 77-104; 이승혜, 「고려시대 불복장의 형성과 의미」, 『미술사학연구』 285(2015), pp. 71-100; 정은우, 「고려시대 불복장의 특징과 형성배경」, 『미술사학연구』 286(2015), pp. 31-58.

7 권순정, 「1302년 아미타불복장물 분석」, 『고려의 불복장과 염직』 (계몽사, 1999); 김영숙, 「고려시대 직물환경과 아미타불복장 직물의 성격」, 『고려의 불복장과 염직』 (계몽사, 1999); 심연옥,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유물의 직물분석과 제작의미」, 『미술사연구』 29(2015), pp. 85-119.

8 남권희, 「12세기 간행의 불교자료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17(1999), pp. 373-420; 「고려시대 다라니와 만다라류에 대한 서지적 분석」, 『고려의 불복장과 염직』 (계몽사, 1999); 同著, 「고려시대 『밀교대장』 권9의 서지적 연구」, 『서지학연구』 58(2014, 6), pp. 5-54; 송일기, 「광주 자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복장전적고」, 『서지학보』 28(2004), pp. 79-114; 同著, 「개운사 아미타불 복장본 『화엄경』 연구」, 『서지학연구』 47(2010), pp. 23-56; 同著, 「수국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복장전적 연구」, 『서지학연구』 58(2014), pp. 119-146.

9 신은제, 「고려후기 복장기록물의 내용과 발원자들」, 『한국중세사연구』 45(2016), pp. 291-336.

10 이선용, 「한국불교복장의 구성과 특성연구」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8).

11 태경, 『조상경』 (운주사, 2006).

12 남권희, 「조상경 판본의 서지적 연구」, 『전통 불복장의식 및 점안의식: 불교무형문화유산 학술보고서』 (2014); 전효진, 「조선시대 조상의문(造像儀文)의 찬술과 간행- 『조상경造像經)』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17(2020), pp. 301-331.

13 『妙吉祥平等祕密最上觀門大教王經』 권1(T. 20, No. 1192, p. 907)

14 위의 책, p. 907.

15 1824년 간행된 유점사판 『조상경』은 이 내용 가운데 ‘소입제색’의 내용을 기초로 정리해서 수록하였다.

16 1열: 靑木香 藿香 沈香 乳香 丁香 苻子 荷子 人蔘 甘草 桂心 瑠璃 琥珀 眞珠 生金 生銀. 2열: 大黃 小黃 牛黃 雌黃雄黃 心鏡 心珠 喉鈴 五色帛 五色糸十五尺 乾飯 五穀 黃幅子 舍利同 八葉同. 3열: 靑花 大靑 大綠 朱紅 黃漆 南粉 漆 阿膠.

17 해인사 소장 『聖像塑畵腹藏儀』는 현재 해인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불교 전통 불복장 및 점안의식 보존회’에서 영인하여 비매품으로 제작하였다.

18 자현의 『묘길상대교왕경』은 1062년 한역되었는데, 이 경전은 고려대장경에 포함되지 않아 언제 고려로 유입되었는지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19 거안에 대한 내용은 정은우, 신은제, 앞의 책, pp. 141-149 을 참조하였다.

20 이 발원문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자료에 사진이 올라와 알려지게 되었다. 이 유리건판은 ‘황해 황주 성불사 관계 고문서’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있다(건판036984, 건판036985). 유리건판 사진은 현재 국립중앙 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 박물관 유리건판 웹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다.(https://www.museum.go.kr/dryplate/main.do)

21 2존의 불상의 조성연대는 법보전 <비로자나불좌상> 복장공에 기재된 묵서명, 불상의 양식, X-Ray 촬영을 통해 확인된 제작기법, 질량분석이온빔가속기(AMS)를 활용한 목재연대측정을 근거로 각각 다른 견해가 제안되고 있다. 두 불상의 조성연대 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결과는 질량분석이온빔가속기(AMS)를 활용한 목재연대측정이다. 이 연대측정에 의하면 법보전 상은 745~950년이고, 대적광전 상은 950~1090년이었다. 두 불상의 차이는 X-Ray를 통해 불상 내부 구조 분석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X-Ray 촬영조사를 통해 2존의 불상이 모두 접목조로 제작되었으나, 비로전과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은 접목조 결구방식, 鼻孔의 깊이, 못과 꺽쇠의 사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이에 두 불상은 동일시기가 아니라 다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법보전 불상은 늦어도 묵서명에 쓰여 있는 883년 이전에는 조성되었으며, 대적광전 불상은 고려초 희랑대사의 해인사 중창 시점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불상의 도상적 특징에 근거해 2존의 불상을 동일시기인 883년에 제작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서지민, 「海印寺 法寶殿과 大寂光殿 智拳印 佛像에 관한 고찰」, 『불교학보』 84(2018), pp. 151-181 참조]. 불상의 도상적 동일성과 묵서명에 기재된 내용 등을 고려하면 2존 불상의 조성시기는 883년 즈음이라 판단된다[손영문, 「海印寺 法및 寶殿 大寂光殿 의 木造毘盧遮那佛像」, 『미술사학연구』 270(2011), pp. 5-34 참조].

22 이선용, 앞의 논문(2018), pp. 78-80.

23 이 내용은 해인사 필사본 『聖像塑畵腹藏儀』가 19세기 새롭게 저술된 것이 아니라 이전의 경전을 상황에 맞추어 수정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해인사 소장 『聖像塑畵腹藏儀』는 15세기 이래 해인사에서 설행해 온 불복장의례집일 가능성이 높다.

24 『佛說觀佛三昧海經』 권4 (T. 15, No. 0643, p. 668)

25 이용윤, 「불상봉안의식의 정수, 복장」, 『불복장의식 현황조사보고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 불교문화재연구소(2012), p. 21.

26 팔엽통 안립의 절차는 ‘소입제색’ 항목에도 부기되어 있고 이 내용은 ‘복장입물초록’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두 기록이 가진 시기적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는 ‘복장입물초록’의 ‘箇(筒)內藏次第’의 내용만 검토한다.

27 팔엽연봉은 15세기 후령통에서 처음 출현한 것으로 연봉과 팔엽이 분리되는 형태도 있고 서로 결합된 형태도 있으며 입체감이 있는 형태도 있고 평면 형태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선용, 앞의 논문(2018), pp. 101-103.

28 문수사 오보병의 형태에 대해서는 이선용, 앞의 논문(2018), pp. 67-69. 참조

29 오경을 화엄에 입각하여 해석한 분석도 있어 주목된다. 태경, 『조상경』 (운주사, 2006), pp. 87-90.

30 유점사판 『조상경』 ‘喉鈴筒內安立次第’에서는 “통 아래 중방 원경을 안치한다(筒底安中方圓鏡)”라고만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유점사판을 기준으로 오경을 논하기는 어렵고 유점사판이 실제 오경의 안립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없다. 조선 후기 후령통에서 오경은 매우 핵심적인 물목으로 등장한다.

31 한편 해인사 필사본 『聖像塑畵腹藏儀』에는 2가지 상반된 기록이 있다. ‘제물예비’ 후령통조에는 후령통을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오경을 언급하였는데 “통체는 즉 오경을 걸며 중방경은 통 아래 붙인다(筒体則懸五鏡 中方鏡付筒底)”라고 하였다. 그런데 ‘喉鈴筒內安立次第’조에서는 아예 오경에 대한 언급이 없다.

32 정은우, 「1502년명 천성산 관음사 목조보살좌상 연구」, 『석당논총』 48(2010), pp. 64-68.

Fig. 1.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 불좌상 후령통> Throat-bell Container recovered from the Vairocana Buddha statue of Pŏppojŏn, Haeinsa (Photo provided by Haei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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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황초폭자 비교>, Comparison of yellow fabric wrappers recovered from the Manjushri statue of Sangwŏnsa and the Vairocana statue of Pŏppojŏn, Haei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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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발원문 비교>, Comparison of Votive Inscrip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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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후령통 비교>, Comparison of Throat-bell Contai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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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해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복장 팔엽통>, Eight-petaled Container from the Avalokiteshvara bodhisattva statue at Haeinsa (ⓒ Haeinsa Templ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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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팔엽통 뚜껑 진심종자 표기 사례> A case of inscribing the characters “眞 心種字” on the cover of an eight-petaled conta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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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오보병과 사리합>, Five treasure bottles and sarira reliquary recovered from the Amitabha Buddha at Hŭksŏksa (ⓒ Daegu Nation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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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왕룡사원 목조아미 타여래좌상 사리합>(왕룡사 원의 조선전반기 불교조각) Sarira reliquary recovered from the Amitabha Buddha statue at Wangnyong sawŏn. After Wangnyong sawŏn ŭi Chosŏn chŏnban’gi Pulgyo chog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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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천성산 관음사 복장물 팔엽합>, Eight-petaled container with sacred objects, Kwanŭmsa, Mount Ch’ŏnsŏ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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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Inventory of items representing the five cardinal directions, stipulated in the Yongch’ŏnsa edition of Sutras on the Production of Buddhist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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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2.
The selected items for pokjang (the practice of inserting objects inside a Buddhist statue) and their contents
Objects Recording chapter Contents
八葉筒 所入諸色 八葉箇(筒)
All Kinds of Things to Be Inserted Eight-petaled container
Eight- petaled container 腹藏入物抄錄 八葉箇(筒)舍利七粒 用圓五分 或寸一分 或 二三分 白瑠璃箇盛之
List of the Selected Items to Be Inserted inside the Pokchang Eight-petaled container and seven sarira grains. Make use of round ones, measuring 5 pun [about 1.5cm], or 1 chon and 1 pun [about 3.3cm], or 2 to 3 pun [about 0.6 to 0.9cm]. Enshrine them with a white glass container.
無孔心珠 所入諸色 銀合內入量 無孔水精一爲心珠也
All Kinds of Things to Be Inserted The contents of a sliver container. One crystal bead without a hole serves as the mind-jewel.
Bead without hole List of the Selected Items to Be Inserted inside the Pokchang 銀合內入量 無孔水精一表心珠也
The contents of a silver container. One crystal bead without a hole represents the mind-jewel.
兩面圓鏡 所入諸色 兩面圓鏡一
All Kinds of Things to Be Inserted One double-sided round mirror
Double- sided circular mirror List of the Selected Items to Be Inserted inside the Pokchang 兩面圓鏡一
One double-sided round mirror
五色絲 所入諸色 五色繩合一條 長十尺 或五十尺 結環喉鈴也
All Kinds of Things to Be Inserted One skein of strings of five colors. It should be 10 ch’ŏk (about 3 m) or 50 ch’ŏk (about 15 m) long. Tie it up around the throat-bell [container].
Threads of five colors 入物色記 五色合繩一條 長十尺 或五十尺 可可
List of the Selected Items to Be Inserted inside the Pokchang One skein of strings of five colors. 10 ch’ŏk (about 3 m) or 50 ch’ŏk (about 15 m) long should be just right.
黃綃幅子 所入諸色 黃綃幅子一 方一尺五寸
All Kinds of Things to Be Inserted One yellow fabric wrapper. Each side of the square measures 1 ch’ŏk and 5 ch’on (about 45 cm) long.
Yellow textile wrapper 入物色記 喉鈴八葉箇裹黃綃幅子一 方一尺五寸可
List of the Selected Items to Be Inserted inside the Pokchang One yellow fabric wrapper to wrap the throat-bell eight-petaled container. Square with each 1 ch’ŏk and 5 ch’on (about 45 cm) long could be used.
發願文 所入諸色 願文一度 靑綃紅書 證明諸師榟匠給侍檀越緣化見聞隨喜助緣者一一備書 入之可也
All Kinds of Things to Be Inserted One votive inscription. Write in red on blue textile. Write down each and every names of the monks who served, including a verifier, sculptors and assistants, patrons and fundraisers, and those who aided and responded with joy upon hearing and seeing [this]. Inserting it will do.
Votive inscription 入物色記 願文一度 靑綃朱書
List of the Selected Items to Be Inserted inside the Pokchang One votive inscription. Write it in red ink on blue fabric.
Table 3.
Comparison between the record of “Inventory of Items inserted in the Inner Recess of Amitabha” of the Munsusa statue and the “List of the Selected Items to be Inserted in the Pokchang” prescribed in the Sutras on the Production of Buddhist Images
Items Sources
“Inventory of Items inserted in the Inner Recess of Amitabha” of the Munsusa statue “List of the Selected Items to Be Inserted in the Pokchang” from Sutras on the Production of Buddhist Images
Five incense 靑木香, 藿香, 沈香, 乳香, 丁香 靑木香 (동) 丁香 (남) 藿香 (서) 沈香 (북) 乳香 (중)
Radix aristolochiae, hyssop, agarwood, frankincense, clove Radix aristolochiae (east), clove (south), hyssop (west), agarwood (north), frankincense (center)
Five medicines 苻子, 荷子, 人蔘, 甘草, 桂心 人心 (蔘, 동) 甘草 (남) 桂心 (서) 阿梨 (북) 附子 (중)
Aconitum, Japanese ginger, ginseng, liquorice, Chinese cinnamon Ginseng or sapodilla (east), liquorice (south), Chinese cinnamon (west), arjaka (north), aconitum (center)
Five treasure 瑠璃, 琥珀, 眞珠, 生金, 生銀 生金 (동) 眞珠 (남) 生銀 (서) 琉璃 (북) 琥珀 (중)
Glass, amber, pearl, gold, silver Gold (east), pearl (south), silver (west), glass (north), amber (center)
Five herbs 大黃, 小黃, 牛黃, 雌黃, 雄黃 大黃 (동) 雄黃 (남) 小黃 (서) 雌黃 (북) 牛黃 (중)
Rhurbarb, sulfur, ox bezoars, orpiment, realgar Rhurbarb (east), realgar (south), sulfur (west), orpiment (north), ox bezoars (center)
Five grains 五穀 大麥 (동) 稷 (남) 稻 (서) 菉豆 (북) 麻子 (중)
Five grains Barley (east), millet (south), rice (west), mung beans (north), hempseed (center)
Eight-petaled container and more 心鏡, 心珠, 喉鈴, 五色帛, 五色糸十五尺, 乾飯, 黃幅子, 舍利同, 八葉同 兩面圓鏡, 心珠, 五色帛, 五色繩, 喉鈴八葉筒, 黃綃幅子
Mirror, bead, offering container, silk in five colors, threads in five colors, 15cheok(4.5m) long, dried rice, yellow fabric wrapper, sarira container, eight-petaled container Double-sided round mirror, bead, silk in five colors, threads in five colors, eight-petaled container, yellow fabric wrapper
Pigment 靑花, 大靑, 大綠, 朱紅, 黃漆, 南粉, 漆, 阿膠
Cobalt blue, cyan blue, blue, scarlet, yellow, dark blue, black, glue
Table 4.
해인사 비로자나불좌상 오보병과 범자(해인사 성보박물관) Siddham letters inscribed on the “five treasure bottles” recovered fom the Vairocana Buddha statue of Pŏppojŏn, Haeinsa (ⓒ Haeinsa Templ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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