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이 논문은 해방 전후 정인보의 교유 관계를 파평윤씨 노종파, 광주이씨 칠곡파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정인보는 일제에 저항한 지식인으로 조선학 운동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의 교유 관계에 대해서 그동안 일제강점기 조선학 운동과 연희전문학교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인보는 소론의 진전을 잇는 인물로 세교와 문교라는 전통적 교유 의식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는 해방 전후 파평윤씨 노종파의 윤기중, 광주이씨 칠곡파의 이만환 등과 세교・문교를 계기로 교유하고 있었다. 먼저, 정인보와 파평윤씨 노종파와의 관계는 당시 예학자로 이름난 윤기중과의 관계로부터 시작되어 같은 소론계라는 인연을 매개로 더욱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정인보는 파평윤씨 노종파 인물들과 시문을 주고받았고, 이들의 선조 묘문을 찬술하였으며, 윤기중의 조카 윤석오에게 학문을 전하였다. 한편,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 서울에서의 생활이 어려워진 정인보는 1945년 3월 전북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에 은거하였는데, 윤기중과 윤석오의 도움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정인보는 은거 소식을 친밀한 몇 사람에게만 알렸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광주이씨 칠곡파의 이만환이다. 정인보와 광주이씨 칠곡파와의 관계는 선대의 인연(정태화와 이도장 간의 친교)으로 가능했다. 정인보는 이상기, 이만환과 시를 주고받으며 문교를 이어갔고, 중요한 정보가 있을 때마다 공유했다. 한편, 이만환은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정인보의 집안 살림을 보살펴 주었으며, 아들의 진학 문제를 상담하기도 하였다. 또한 해방 후에 그는 정인보가 주도하는 국학대학 승격과 한중문화협회 재건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해방 전후 정인보와 파평윤씨 노종파, 광주이씨 칠곡파의 관계는 세교와 문교를 통해 시작되었지만 단순한 교유를 넘어 이들은 일제에 의해 탄압받던 정인보를 후원하고 해방 이후 정인보가 주도한 국학 부흥 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되었다.

키워드

해방, 정인보, 파평윤씨 노종파, 광주이씨 칠곡파, 윤기중, 윤석오, 이만환, 국학대학, 한중문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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