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틴의 모든 소설은 외적으로는 구애와 결혼이라는 낭만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심층적으로는 결혼이 철저히 물질적인 조건에 좌우된다는 것을 밝히는 반낭만적인 것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윌러비가 돈 많은 그레이 양과 결혼하기로 하자 제닝스 부인은 그가 신의는 저버려도 물질적인 쾌락은 저버릴 수 없는 남자라고 비난하지만 사실 윌러비가 오스틴의 소설 세계에서 특별히 부도덕하다고 할 수 없다. 이 세계에서는 대부분의 남성들이 가계규모를 줄여서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기보다는 정략결혼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인 에드워드 페라스조차도 엘리너와 결혼하기로 한 후에 연 수입 350파운드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없다고 여기고 상속을 받기위해서 어머니와 굴욕적으로 화해한다(269). 그러므로 에드워드와 다르게 사교적이고 방탕해서 늘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윌러비와 위컴에게 안락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정략적인 결혼은 선택이 아닌 필수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스틴은『오만과 편견』에서 이 남성들보다 더 절박한, 지참금이 적은 여성들의 경제적 박탈상태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제인이 감기에 걸려서 빙리와 만날 수 있도록 말을 태워 보내는 ‘목숨을 건’모험을 하도록 하고, 베넷 씨 앞에서 콜린즈(Collins)와 결혼하라고 엘리자베스를 다그치는 베넷 부인의 행동은 희극적이지만 역설적으로 바람직한 결혼이 토지 상속을 받을 수 없는 젠트리 계층 여성의 생존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롱본(Longbourn)의 저택과 영지를 상속받게 되고 목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얻은 콜린즈의 청혼을 엘리자베스가 거절하는 것은 그녀가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을 하지 않는 일탈적인 여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제인을 보기 위해서 비 온 후 더러운 길을 혼자서 걸어온 엘리자베스는 빙리 양(Caroline Bingley)이 조롱하듯이 신경이 예민하고 연약한 척하는 당대 숙녀의 기준을 따르지 않고 “오만해 보일 만큼 독립심”(36)을 과시하는 일탈적인 여성이다.
재산과 신분을 중요한 조건으로 여기는 결혼에 대한 당대의 보편적인 진리에 저항하는 엘리자베스는 매리앤처럼 감정적인 요소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감수성의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좋은 인상과 능란한 화술을 지니고 있지만 영지도 없는 가난뱅이 위컴에게 연정을 보이고 일 년에 만 파운드의 수입을 지닌 다아시의 청혼을 거절한다. 다아시의 질투 때문에 성직을 빼앗겼다는 위컴의 거짓말을 엘리자베스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메리턴(Meryton)의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유혹할 정도로 예쁘지 않다는 다아시의 말에 적대감을 갖고 있던 차에 잘생긴 위컴이 자신을 편애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의 감수성이 이미 위컴을 편애하는 상황에서 제인과 빙리 양의 반박은 그녀의 이성적 판단에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죠지아나(Georgiana Darcy)를 보호하려고 다아시가 위컴과의 관계를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빙리 양이 집사 신분의 아버지를 둔 위컴은 명예롭게 행동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자(93) 엘리자베스는 신분에 집착하는 다아시와 빙리양에게 ‘무시당하는’위컴에게 더욱 더 연정을 느낀다.
감수성의 지배를 받는 엘리자베스와는 대조적으로 샬럿(Charlotte Lucas)은 유리한 결혼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감정을 과장하거나 조작할 수 있어야 한다고주장한다. 샬럿은 제인이 빙리에 대한 애정을 감추려 한다면 그를 놓치게 될 것이므로 실제로 느끼는 것보다 감정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서 그의 구애를 도와야 한다고 충고한다(22-23). 샬럿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제인의 태도는 남편을 구해야 하는 여성의 목적의 달성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소극적인 행동이다. 부유한 남편을 얻는 목적을 위해서는 여성이 감정을 실제보다 과장해서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샬럿의 말은 여성이 남성을 조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 실제로 그녀는 콜린즈가 엘리자베스에게 퇴짜 맞자마자 그의 비위를 맞추어서 곧 청혼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한다. 행복의 가망성이 불확실해도 결혼은 교육을 잘 받았지만 재산이 별로 없는 처녀를 궁핍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대책(120)이라는 샬럿의 책략적인 결혼관은 대부분의 젠트리 계층의 여성들이 갖고 있는 정상적인 관념이었다.
이 결혼에 대해서 엘리자베스가 분노하는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분별력이 있다고 여겼던 샬럿이 순전히 결혼이라는 안식처를 얻기 위해서 낭만적인 감정을 무시하고 존경할 수 없는 남자를 선택한 것에 대한 충격이다. 그러나 샬럿이 콜린즈의 아내가 되어서 롱본을 접수할 것이라는 미래의 전망에 대한 베넷 부인의 비이성적인 공포(127-28)를 무의식적으로 공유하는 것 같은 엘리자베스의 분노에 대해서 제인은 그녀의 언어가 너무 과격하다는 점을 지적한다(133). 오스틴도 경제적 안정을 위해 킹 양(Miss King)에게 관심을 돌린 위컴에 대해서는 잘생긴 남자도 먹고 살아야 한다면서 관대하게 봐주면서 동일한 행동을 한 샬럿에게 분노하는 엘리자베스의 행동을 두고 위컴에 대한 그녀의 판단이 명석하지 못했다고 지적함으로써 그녀의 감수성의 비이성적인 측면을 문제 삼는다(147). 감수성에 좌우되는 엘리자베스의 판단이 오류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경우는 확고함과 주체적인 판단력을 결여하고 친구에게 쉽게 설득당하는 빙리를 그녀가 정이 많고 우정을 중시하는 좋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칭찬하는 대목이다.
“. . . 자네가 오늘 아침에 베넷 부인에게 네더필드를 떠나겠다고 결심만 하면 5분 만에 가버릴 것이라고 말했을 때 자네 자신을 찬사하는, 칭찬하려는 의도였을거야. 그렇지만 필요한 일도 처리하지 못하고 자네 스스로나 다른 사람에게도 정말 이득이 되지도 않을 조급함을 부리는 것에 무슨 그렇게 칭찬할 만한 것이 있겠나? . . . 나는 자네가 그렇게 신속하게 가버릴 것이라고는 절대로 확신하지 않네. 자네의 행동은 내가 아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만큼이나 우연에 좌우될 것이네. 자네가 말을 탈 때 친구가 혹시 ‘빙리, 자네 다음 주까지 머물러주면 좋겠네,’라고 말한다면, 자네는 아마도 가지 않을 거야. 또 친구가 한 마디 더하면 아마 한달을 더 머무를 수도 있을 것이네.”
“당신의 말은 빙리 씨가 자신의 기질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만 입증한 셈이네요. 빙리 씨가 했던 것보다 당신의 말이 더 그를 돋보이게 하네요,”라고 엘리자베스가 크게 말했다. . . .
“자네는 내가 인정한 적도 없는데 자네가 내 의견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의견들을 내가 설명하기를 기대하는군. 베넷양, 상황이 당신이 설명한 대로라고 인정한다면, 빙리가 집으로 돌아오고 계획을 연기하기를 바라는 그 친구는 그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이유도 대지 않고 그것을 소망했고 요청했다는 것을 당신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친구의 설득에 기꺼이, 쉽게 넘어가는 것은 당신에게는 전혀 장점이 아닌가보죠.”
“확신도 없이 설득에 넘어가는 것은 그 어느 쪽도 분별력이 있다고 칭찬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다아시 씨, 당신은 우정과 애정이 지닌 영향력을 전혀 참작하려 하지 않는 것 같군요. 그 간청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이유가 없다 해도 사람들은 간청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심 때문에 기꺼이 그 간청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 ”
“. . . When you told Mrs. Bennet this morning that if you ever resolved on quitting Netherfield you should be gone in five minutes, you meant it to be a sort of panegyric, of compliment to yourself—and yet what is there so very laudable in a precipitance which must leave very necessary business undone, and can be of no real advantage to yourself or any one else? . . . I am by no means convinced that you would be gone with such celerity. Your conduct would be quite as dependant on chance as that of any man I know; and if, as you were mounting yourhorse, a friend were to say, ‘Bingley, you had better stay till next week,’you would probably do it, you would probably not go—and, at another word, might stay a month.”
“You have only proved by this,”cried Elizabeth, “that Mr. Bingley did not do justice to his own disposition. You have shewn him off now much more than he did himself.”. . .
“You expect me to account for opinions which you chuse to call mine, but which I have never acknowledged. Allowing the case, however, to stand according to your representation, you must remember, Miss Bennet, that the friend who is supposed to desire his return to the house, and the delay of his plan, has merely desired it, asked it without offering one argument in favour of its propriety.”
“To yield readily—easily—to the persuasion of a friend is no merit with you.”
“To yield without conviction is no compliment to the understanding of either.”
“You appear to me, Mr. Darcy, to allow nothing for the influence of friendship and affection. A regard for the requester would often make one readily yield to a request without waiting for arguments to reason one into it . . .”(48-49 인용자 강조)
제인을 만나러 온 베넷 부인에게 마음만 먹으면 5분 만에 네더필드 파크(Netherfield Park)를 떠날 수 있다고 한 빙리의 말에 대해 다아시는 만약 친구가 가지 말라고 하면 그가 마음을 바꾸어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빙리가 친구의 말 한마디에 곧 결심을 바꾸는 주관이 확고하지 않은 성격이라는 점을 비판하는 다아시에 반발해서 엘리자베스는 빙리가 친구와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주장한다. 다아시는 그 친구가 합당한 이유도 대지 않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빙리가 쉽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올바른 행동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친구의 설득에 쉽게 넘어가서 의견을 바꾸는 빙리가 우정을 중시하고 정이 많다는 감정적인 관점에서 그를 칭찬하면서도 빙리의 행동이 현명했는지를 논할 만한 적절한 상황이 발생할 때까지 기다려서 판단을 내리자고 한다.
런던에 간 빙리 양이 빙리를 죠지아나와 결혼시키려 한다는 편지를 보내자 엘리자베스는 누이와 다아시의 계략에 줏대 없이 휘둘리는 빙리에 대해 분노한다. 다아시는 빙리가 자신의 판단에 크게 의지하기 때문에 하트퍼드셔로 돌아가지 못하게 그를 설득하는 것은 너무 쉬웠다고 말한다(192-93). 엘리자베스는 빙리가 단호하지 못해서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제인에게 말하는데(131),이것은 쉽게 설득당하는 빙리의 성품이 친구에 대한 우정을 보여주는 장점이라고 한 앞선 자신의 칭찬과 모순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근친인 제인의 행복이 걸린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자 비로소 친구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확고해야 한다는 다아시의 지적이 옳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앞서 엘리자베스가 빙리를 옹호한 것은 그가 제인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다는 것과 엘리자베스 자신이 다아시를 미워한다는 두 가지 사실에 영향을 받은 감상적인 의견으로서 오류가 있다.
감정을 중시하는 엘리자베스의 감수성은 오류를 초래하기도 있지만 직관력과 상황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빙리의 우유부단함에 대해서 분노하는 엘리자베스에게 제인은 빙리 양이 자기와 빙리를 때어놓지 않았을 것이라며 빙리 양을 옹호한다. 그러나 빙리는 누이와 다아시의 조종을 받고 네더필드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다. 엘리자베스의 감상성의 극단적인 측면을 거부하는 제인은 모든 사람들이 선량한 동기를 갖고 행동한다고 여기며 온건한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마코비츠가 지적하듯이 수동적인 제인의 행복은 운의 산물이고(Markovits 783-84),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행복을 쟁취하는 엘리자베스의 노력 덕택에 얻어진다.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아시는 제인의 표정과 태도가 평온해서 빙리에게 무관심한 것으로 판단하고 제인과 결혼하지 말도록 설득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아시는 남자가 애정을 보이면 여자도 그에 상응하는 애정 표현을 해야 한다고 여기므로 제인이 빙리의 애정에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구애 대상인 여성의 솔직한 감정 표현을 상대 남성의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데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점에서 다아시는 샬럿과 동일한 관점을 보여주지만 다아시는 샬럿과는 다른 이유 때문에 감정의 표현을 옹호한다. 샬럿은 결혼시장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인 여성이 부유한 남성을 사로잡기 위한 책략으로서 감정의 적극적인 표현을 권유한다. 반면에 다아시는 여성은 수동적이고 허약하며 정숙하게 애정을 감추고, 지성의 계발은 도외시한채 다만 결혼을 잘하기 위해 자질구레한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여성관에 도전한다. 그러므로 다아시는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빙리양이나, 온실의 화초처럼 창백하고 기운 없는 앤 드 버그(Anne de Bourgh) 양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 의견이 확고하고 독립적이어서 보편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엘리자베스에게 매력을 느낀다. 진흙탕길을 걸어와서 치맛단이 더러워진 엘리자베스를 보고 빙리 양은 충격을 받지만 다아시는 그녀에게서 운동으로 생기 넘치는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말에 건방져 보일 정도로 대꾸하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15 다아시가 인습적인 틀을 벗어나는 일탈적인 여성을 처음부터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메리턴의 무도회에 처음 등장했을 때 다아시는 이미 알고 있던 빙리 자매와만 춤을 추고 다른 여성과 교류하기를 거부하는데 이것은 그가 전통적인 여성관을 고수하려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건강하고 활기 넘치는 엘리자베스에게 끌리면서 다아시의 여성관도 인습성을 벗어나게 된다. 루소와 괴테의 감상소설에서 남편이 도덕적이지만 관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브랜든 대령도 과거에 감수성의 남성이었다는 주장을 무색해 보이게 할 정도로 따분해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다아시는 삼각관계에서 남편이지만 낭만적인 애인처럼 기존 질서에 도전적이고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다아시가 감수성을 수용하면서 인습적이고 경직된 모습을 점차 탈피하듯이 다아시의 편지를 받고 난 후 엘리자베스도 빙리를 판단하는 기준이었던 우정이나 위컴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던 외모와 사교적인 태도와 같은 감상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는 잘못된 판단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엘리자베스는 샬럿과 다아시와 같은 제 삼자의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제인이 빙리에게 충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위컴의 도덕성을 뒷받침하는 어떤 검증된 사실도 없는데도 외모와 화술 때문에 그를 도덕적이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위컴이 보이는 편애에 만족하고, 다아시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불쾌해져서 스스로 선입관과 무지를 초래했고 이성을 쫓아냈다는 것을 인정한다(202). 사실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미래를 어머니로부터 끊임없이 상기 받기 때문에 매리앤처럼 감수성에 탐닉할 여유가 없고, 그녀의 감수성은 기꺼이 이성에 의해 제어되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컴이 다아시를 피하려고 네더필드의무도회에 불참석했다는 말을 듣고 불쾌감은 커지지만 위컴에 대한 연정 때문에 그보다 열배나 더 중요한 다아시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샬럿의 현실적인 충고를 무시하지 못하고 춤을 추자는 청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89). 특히 가드너 부인(Mrs. Gardiner)이 위컴을 편애하는 것이 경솔하고 한사상속으로 불안정한 베넷씨도 엘리자베스가 가난뱅이와 결혼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라는것을 암시하자(142) 엘리자베스는 지금까지 위컴에 대해 가졌던 연애감정이 종식되어야 하고 자신의 감수성이 검열되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한다. 따라서 윌러비의 배신에 매리앤이 죽음의 문턱에까지 가는 것과는 다르게 엘리자베스는 상속녀인 킹 양에게 위컴이 관심을 돌렸을 때 자신이 돈이 많았으면 그가 자기를 선택했을 것이라면서 관대한 반응을 보인다. 피쯔윌리엄 대령(Colonel Fitzwilliam)이 차남은 결혼을 통해서 재정적 안정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시점에 이르러서 엘리자베스는 낭만적인 감수성만을 추구하는 이상적인 결혼이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게 된다. 샬럿과 달리 결혼에서 경제적 안정과 낭만을 동시에 추구하는 엘리자베스는 위컴과 피쯔윌리엄 대령처럼 자산이 없는 남자와 결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 다아시가 감수성과 열정을 갖춘다면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다아시는 애인인 위컴으로부터 성적인 매력을 탈취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감수성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매력적인 남편으로 변화한다. 녹스 쇼가 지적하듯이『오만과 편견』에서 성적인 매혹은 애매한 만큼이나 웅변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이것은 겉으로는 싫어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리는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에게 가장 잘 드러나 있다(Knox-Shaw 88). 그러나 성욕을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던 당대의 관습에 따라 오스틴은 성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고 성적 욕망을 다른 상징적인 행동으로 치환한다. 앨런은 당대의 점잖은 예법에 따라서 오스틴의 주인공들의 상호 이끌림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욕망의 배출구인 춤과 응시와 같은 행위로 치환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Allen 426). 메리턴의 무도회에서 다아시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유혹할 만큼 충분히 아름답지 않다면서 춤추기를 거절하지만 그 후에 그는 계속 춤을 청하는데 다아시의 끈질긴 청은 점차 그녀에게 끌리는 것을 의미한다. 위컴을 완전히 자신에게 반하게 만들려고 네더필드의 무도회에 보통 때보다 더 신경써서 예쁘게 치장하고 가는 엘리자베스에게도 춤은 욕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다아시는 오스틴의 다른 어떤 주인공보다 언어를 통해 표현이 금기시된 욕망을 응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다아시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엘리자베스는 그가 자기를 흠잡으려고 한다고 오해하지만 사실 그의 응시는 아름다운 눈에 매혹된 그의 욕망의 배출구의 역할을 한다. 엘리자베스와 춤추기를 거절한 직후부터 다아시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욕망의 시선을 보내고, 그녀가 네더필드로 제인을 간호하러 오자 그녀가 계속 머무르면 완전히 매혹당할까 두려워한다. 헌스퍼드(Hunsford)에서 엘리자베스를 다시 만난 다아시는 더욱 그녀에게 열정적으로 이끌린다. 로징스 파크(Rosings Park)에서 피쯔윌리엄 대령의 청으로 피아노를 치는 엘리자베스에게 가까이 와서 감상하고, 다음날 그녀가 혼자 있을 때 방문해서 이번에도 의자를 끌어당겨서 그녀 가까이 가는 것은 그가 욕망을 점점 억제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나타낸다(170, 175). 우튼은 오스틴이 바이런적인 낭만적 주인공을 창조하고 난 후 바이런의 시와는 달리 그를 사회적 규범에 적응하도록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다아시라고 말한다.16 다아시는 자신의 의식적인 통제를 벗어나려는 욕망의 존재에 초조해하며 낭만적 열정에 찬 바이런 시의 주인공처럼 억제된 열정을 분출하며 청혼한다. 그러나 신분의 열등이 정신의 열등을 수반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가족의 열등한 신분을 지적하는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그러므로 엘리자베스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합당한 배우자가 되기 위해서 다아시는 계급적 우월감을 버리고 부르주와 계급과의 융합을 받아들여야한다.
스태시오와 던컨은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어야 한다는 기독교 교리에 기반한 결혼관이 18세기부터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에 바탕한 더 세속적인 동반자적 결혼관의 선호로 바뀌기 시작했고 이것은『오만과 편견』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말한다(Stasio and Duncan 134-39).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여성은 결혼 상대자가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지, 또 좋은 매너를 보이고 관대하며 지성적인지의 여부를 중시한다. 다아시는 메리턴의 무도회에서 엘리자베스와 춤추기를 거절한 때부터 매너가 좋지 않은 남자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가 바람직한 배우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좋은 매너와 관대함을 증명해 보여야한다. 그는 런던의 뒷골목을 뒤져서 위컴의 빚을 갚아주고 리디아와 결혼을 성사시키고, 죠지아나에게는 헌신적인 오빠로서의 모습을 보임으로서 베넷씨보다 더 책임 있는 가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엘리자베스에게 보여준다. 로징스 파크에서 엘리자베스는 피아노에 능숙하지 않은 자신이 연습이 필요한 것처럼 다아시도 계급적 배타성을 버리고 자신과 같은 부르주와 계급을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171). 다아시는 그녀의 말에 따라서 가드너 부부를 펨벌리에 초대함으로써 부르주와 계급과 융합을 수용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펨벌리를 보고 다아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엘리자베스의 농담은 계급적 타협을 수용한 다아시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로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제인이 감정을 절제하며, 빙리는 다아시의 판단에 의지하는 소극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엘리너와 에드워드의 관계와 흡사하다. 그러나 매리앤과 브랜든 커플과 유사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관계는 많은 변화를 보인다. 매리앤과 달리 엘리자베스는 감수성을 자기검열해서 통제할 수 있고, 중년의 브랜든이 매리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감수성의 잔해에 불과하다면 다아시는 젊고 열정적인(a man violently in love 346) 연인이다. 윌러비는 감수성을 가장한 방탕아이고 경제적 안락을 위해 낭만적 사랑을 희생하지만 타인에 대한 중상모략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엘리너는 사경을 헤매는 매리앤에게 사죄하기 위해서 런던에서 달려온 윌러비의 진심을 확인한 후 면죄부를 부여하고, 매리앤은 자신을 버린 그를 여전히 열정적인 애인으로 기억한다. 반면에 위컴은 다아시와 관계에 대해서 거짓말을 한다는 점에서 윌러비보다 더 타락한 유형의 애인이고, 오직 천박한 본능만을 소유한 그의 악행에는 어떤 변명도 허용되지 않으며 끝까지 그는 펨벌리라는 유토피아로부터 배제된다.
오스틴은 감수성이 강한 여주인공과 애인의 관능적인 열정이 비극으로 끝나고, 시민적인 도덕성을 갖춘 남편과 아내의 성적인 이끌림이 배제된 의무적인 결혼을 현실에서의 이상으로 제시하는 루소와 괴테의 감상소설의 구도를『오만과 편견』에서 전복시킨다. 샬럿과 콜린즈의 결합은 성격과 기질이 얼마쯤 일치하며 열정을 결핍한 남녀가 사회적인 의무 수행을 위해 결혼하는 부르주와 계급의 결혼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볼마르와 결혼한 쥘리가 생 프뢰에게 보낸 편지에서 옹호한 결혼관과 일치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샬럿의 결혼을 속물적으로 여기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쥘리의 결혼관에 저항한다. 루소와 괴테의 소설에서 애인과 여주인공의 이루어지지 못한 결합은 여주인공과 남편의 이루어진 결합보다 더 낭만적인 가능성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비극적인 결말은 필연적이다. 그러나『오만과 편견』은 시민적 의무의 수행과 도덕성과 열정을 모두 다아시의 속성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행복한 결말이 가능해진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결합으로 일탈적인 욕망은 순화되어 가정의 영역으로 수렴되면서 가정은 낭만적이면서 이성에 의해 절제된 이상적인 공간이 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행복한 결혼은 역설적으로 완전한 행복의 포기와 욕망의 억제를 통해서 가능하고, 기대된 욕망의 충족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욕망의 충족은 기약 없이 미래로 지연될 것이라는 점이 암시된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전에도 발견된 바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조바심하며 기대했었던 사건이 실제로 발생할 때는 그녀 자신이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모든 만족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실제적인 완전한 행복이 시작될 미래의 다른 시기를 지정하고, 그녀의 소망과 희망이 이루어질 미래의 다른 시점을 정하고, 다시 기대의 즐거움을 누림으로써 당분간 스스로를 위로하고, 또 다른 실망에 대비해 준비하는 것이 필요했다. 호반 지방으로의 여행은 이제 가장 행복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었다. 그 여행에 대한 생각은 어머니와 키티의 불만족 때문에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불편한 시간 동안 그녀에게 가장 큰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만약 그 여행 계획에 제인을 포함시킬 수 있었더라면 그것은 완벽한 계획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부족함이 있어서 소망할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전체적인 계획이 완벽하다면 나는 분명히 실망할거야. 그렇지만 제인이 같이 가지 않아서 끊임없이 유감스러워할 테니 즐거움에 대한 모든 기대가 실현될 거라고 희망해도 무리가 없을거야. 계획의 모든 부분이 즐거움을 가져올 가망성이 있으면 그 계획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거야. 뭔가 특별히 짜증나게 하는 사소한 일이 방어 수단으로 있어야만 전체적인 실망을 피할 수 있어.”
Upon the whole, therefore, she found what has been sometimes found before, that an event to which she had looked forward with impatient desire, did not, in taking place, bring all the satisfaction she had promised herself. It was consequently necessary to name some other Upon the whole, therefore, she found what has been sometimes found before, that an event to which she had looked forward with impatient desire, did not, in taking place, bring all the satisfaction she had promised herself. It was consequently necessary to name some other
군인들이 메리턴을 떠나면 만족스러울 줄 알았지만 어머니와 키티(Kitty)가 낙이 없어졌다고 불평하고 브라이튼(Brighton)에 간 리디아는 군인들과 어울리면서 더 어리석어질 것이라는 우울한 생각을 하는 엘리자베스는 기대했던 만족이 오지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엘리자베스는 호반 지방으로 여행을 가자는 가드너 부부의 제안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를 한다. 그러나 완벽하게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는 큰 실망을 가져오기 때문에 제인이 같이 가지 않는다는 불완전함이 있으면 기대도 크지 않아서 적당히 만족할 수 있고 실망을 막아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완벽한 행복을 기대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의 법칙으로 알게 되어서 이제 그녀는 완벽한 행복을 기대하기 보다는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실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욕망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충족을 추구하면 가난과 불행이 주어지고, 욕망의 완전한 충족을 포기했을 때 행복은 주어지지만 그 행복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에 대한 기대를 일으키고 완전한 욕망의 충족은 기약 없이 미래로 지연된다는 법칙은 작품 전체에서 발견된다.
욕망 없이 조건만 보고 결혼한 샬럿과 콜린즈의 결혼이 진부한 반면에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관계가 매력적인 것은 이들의 사랑에서 욕망이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급적인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욕망은 길들여지고 절제되어야 한다. 특히 도덕적 평판에 여성의 교환가치가 좌우되는 남성중심사회에서 젠트리계층 여성의 성적 욕망은 일순간에 가족에게 불명예를 가져오고 그녀자신은 안락하고 보호받는 중상계급에서 추방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감수성과 욕망을 통제하도록 요구받는다. 일탈을 제어하는 분별력과 지성을 갖추고 있는 엘리자베스와는 달리 리디아는 분별력이 없는 미숙한 정신과 동물적인 본능만을 소유하고(She had high animal spirits 45) 있다는 점에서 위컴과 같은 종류의 인물이다.17 욕망을 절제하지 않기 때문에 위컴은 가는 곳마다 빚을 지고,리디아는 빚쟁이로부터 도망치는 위컴이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사랑의 도피행을 한다. 리디아가 위컴과 도망갔을 때 공포에 질린 엘리자베스는 위컴과 결혼하지 못한 리디아가 처할 수 있는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하는데 첫째는 매춘부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교계를 떠나 시골에 은둔해서 잊혀지는 것이다(293). 물론 전자가 가문에 더 치욕적이겠지만 두 가지 모두 아버지의 사후에 집에서 쫓겨나야 하는 남은 4명의 딸들의 유망한 결혼의 전망을 암울하게 만들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리디아와 위컴이 미덕보다 열정이 강해서 도망쳤기 때문에 영속적인 행복이 가능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296) 이것은 그녀가 욕망의 억제를 행복의 전제 조건으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욕망을 부인해야 그것이 충족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리디아는 사랑과 재정모든 면에서 결핍을 겪게 된다는 앨런의 지적처럼(Allen 437) 결말에서 위컴과 리디아는 수입은 불충분하고 결혼생활은 만족스럽지 않은 부부로 남게 된다. 반면에 욕망의 즉각적인 충족을 억제하고 빙리와 다아시와 결혼의 전망을 단념한 제인과 엘리자베스에게는 행복하고 풍족한 결혼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리디아가 도망간 후 유리한 결혼의 전망이 위협받자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에게 가장으로서 책임 있게 가족을 통제할 것을 요구하고 그녀 자신도 이전에는 자유롭게 구사했던 위트와 감수성을 제어하려고 한다. 엘리자베스의 감수성과 위트가 지닌 잠재적인 다층성과 전복의 힘이 다아시의 판단력 아래에 포섭되는 과정은 그녀가 일탈을 떨치고 성장하는 과정으로 제시된다.18 감수성의 과잉을 억제하고 달성된 엘리자베스의 성장은 펨벌리가 상징하는 상류층과 베넷 부인의 아버지와 필립스 씨(Mr. Philips), 가드너 씨가 각각 상징하는 변호사와 상인으로 이루어진 전문직업을 가진 신흥부르주와 계급의 타협과 병행된다. 작품에서 상류층은 다아시와 캐서린 영부인처럼 오만하고 권위적이고 경직되어 있거나, 앤 드 버그처럼 생기 없고 허약하다. 캐서린 영부인은 앤을 다아시와 정략결혼시키려고 하지만 이들의 결혼은 이미 지나친 순혈주의와 동종교배로 화석화된 상류층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계급으로서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류층은 부르주와 계급으로부터 활력을 공급받아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다. 다아시가 앤 드 버그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활력이 넘치는 부르즈와 계급 출신의 엘리자베스를 선택하는 것은 프레이먼의 주장처럼 상류층의 허약함을 인식하기 때문이다(Fraiman 186).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결혼을 반대하는 캐서린 영부인은 베넷 부인과 그녀의 형제들의 신분을 문제삼는데 이것은 그녀가 신흥 부르주와가 상류층에 침투하는 것에 대해서 극도로 경계하기 때문이다(337). 엘리자베스의 외숙이 런던의 치프사이드(Cheapside)19에서 장사를 한다는 소식에 다아시도 그녀가 전망 좋은 결혼의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한다(37). 그러나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와 결혼에 걸림돌이라고 여겼던 장사하는 가드너 부부를 그녀의 친척 중에서 가장 분별력 있고 대화가 가능한 상대로 인정하게 되는데, 이들의 분별력의 단면은 가드너 부인의 결혼관에서 엿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가 가난한 위컴과 결혼하는 것이 신중하지 못하다고 경고했던 가드너 부인은 부유해진 킹 양에게 구애하는 위컴에 대해서 결혼에서 돈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구애할 때 돈이 목적이 아닌 것처럼 보이도록 예절이라는 포장을 요구한다(151). 분별력 있는 부르주와 계급을 대변하는 가드너 부인의 결혼관은 영지의 확장과 기득권 수호를 위해 정략결혼을 추진하는 캐서린 영부인의 결혼관과 다를 바 없이 물질적이고 가식적이다.
다아시 부부가 가드너 부부를 사랑하고 감사한다는 구절로 마무리되는『오만과 편견』의 결말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결혼이 신성한 펨벌리의 숲을 상인과 변호사 그리고 위컴의 아버지의 직업이었던 집사와 같은 낮은 계층에 의해 오염시킬 것이라는 캐서린 영부인의 주장을 보기 좋게 반박하고 펨벌리는 부르주와와 상류층의 행복한 융합의 장소로 보인다. 또 엘리자베스의 활기로 다아시의 딱딱함이 누그러지고 태도가 개선될 것이고, 다아시의 판단과 세상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엘리자베스는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전망은 이들의 결혼이 권위주의와 순혈주의로 활력을 잃어가는 상류층과 권위를 필요로 하는 부르주와 계급의 상호이해를 충족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계급간의 융합은 상류층이 자신들처럼 물질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는 부르주와계급 일부에게 문호를 개방한 것에 불과하고, 다른 하위 계층이 배제된 폐쇄적인 이 연합에는 사회의 공동선과 같은 대의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20 일탈적인 감수성과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획득된 엘리자베스의 성장은 본질적으로 젠트리 계층의 안락을 보장받기 위한 사회화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펨벌리에서 엘리자베스의 행복은 불완전하고 욕망의 충족은 기약 없이 미래로 지연될 것이며, 그녀의 부르주와적 감수성은 제어되고 활기를 상실할 것이라는 전망을 낳는다.21
1 감성, 혹은 감수성(sensibility)은 오늘날은 “정서나 감정의 의미로 쓰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성이나 논리에 반대되는 감상이나 열정을 의미”했기 때문에(한애경 143-44) 감상주의(sentimentalism)와 교환 가능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18세기 감수성소설에서 감수성은 자연이나 예술의 미와 숭고함에 대한 맹렬한 정서적 반응과 감정에 과잉 탐닉하는 성향을 가리키며 이성과 대비되는 용어였다.
2 감수성소설은 리처드슨(Samuel Richardson)의『클래리서』(Clarissa , 1748),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쥘리 또는 신엘로이츠』(Julie, ou la Nouvelle Heloise; Julie, or The New Heloise , 1761)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젊은 베르터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The Sorrows of Young Werther , 1774)에서 인기의 절정에 달했다.
3 프로이드(Freud)에서 푸코(Foucault)에 이르는 20세기 사상가들은 정상성(normality)을 그것과 반대되는 것, 즉 병리성, 일탈과 대립시켜서 정의해왔다. 이들에게 정상성은 의미와 특징을 결여한 상태이며 자신이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제한 것인 병리성을 정의함으로써 정의될 수 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성장의 과정은 병리성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장소설의 주인공은 현대철학과 심리학이 관심을 갖는 병리적인 측면을 떨쳐버린, 특징이 없는 밋밋하고 재미없는 인물이다(Moretti 11).
4 푸코는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면서 규율이 지배의 일반적인 양식이 되었고 훈련과 구속을 통해서 순종하는 신체를 만드는 것이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을 지적한다(푸코 206-07, 234).